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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Aug 14. 2024

<그에게 가는 길>

동궁과 월지에서 달을 마주하다.

 오랜만에 만난 수남이는 예전에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글로써 나의 상처를 낫게 했던 수남이가 이젠 글하고 담을 쌓고 산다고 하니 나도 모르게 화가 났었나 보다. 능력이 출중한 의사가 오히려 자신은 능력이 없다며 집도를 포기한 것마냥 수남이는 자신의 진면목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내게 희망의 빛을 쏴주며 내 어둠을 치유해 줬던 수남이가 하루빨리 펜을 들았으면 좋겠다. 난 회복됐으니까, 다시 새 삶을 꿈꾸고 있으니까, 다시 시작하기 위해 이름까지 바꿨으니까, 절망을 희망으로 바꿨으니까, 그도 새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너로 인해 난 다시 태어났으니까. 수남이 너의 글은 아픈 사람의 마음을 보드랍게 어루만져주는 능력이 있어. 제발 너의 꿈을 포기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수남이를 각성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문득 둘기네집이 떠올랐다. 스무 살의 감성 충만한 수남이가 그렸던 순수와 낭만이 가득했던 노스탤지어가 둘기네집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학과실을 찾아가 둘기네집을 꺼내와야겠다고 맘먹었다. 퇴근하자마자 대학교 방향으로 거칠게 차를 몰아 오랜만에 학과실을 방문했다. 리모델링 공사를 한 탓인지 학과실은 생전 처음 와보는 곳처럼 구조적으로 혹은 분위기적으로 많은 부분들이 예전과는 달랐다. 손기척을 두 번 정도 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학과실에 들어갔다. 국어교육과 후배들로 보이는 학생 몇몇이 왁자지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낯선 이방인을 맞이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학생 한 명과 비교적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었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여학생 한 명이 말을 꺼내 왔다.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아, 전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99학번 선배인데요.”

     

 99학번이라는 수식어에서 위압감이라도 느꼈을까? 후배들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나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다부진 눈매와 사각턱을 가지고 있는 여학생이 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전 올해 과회장을 맡고 있는 박서형이라고 합니다. 혹시 무슨 일로 찾아오셨을까요. 선배님.”     

 과회장이라면 아마 3학년 정도 되겠지? 나도 3학년 때 집행부 임원으로 일했던 적이 순간 떠올랐다. 오늘 학과실에 방문한 이유는 까마득한 후배들과 회포를 풀러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간단명료하게 방문 목적을 밝혔다.

     

“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예전 학과방명록을 좀 볼 수 있을까 해서요.”

“학과방명록이요? 그게 뭐죠?”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갔다. 세월이 흐르긴 했어도 학과방명록은 국어교육과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오랜 전통이었는데 내가 졸업하고 그새 사라져 버린 걸까. 난감함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의 눈빛을 애써 감추고 있을 때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 후배 한 명이 말을 건네 왔다. 겉으로 비치는 얼굴이 스무 살 중반쯤으로 짐작되는 걸로 봐선 아마 군대를 다녀온 남자 후배인 것 같았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학과방명록은 제가 군대 가기 전인 2학년 때 사라졌습니다. 혹시 몇 년도 학과방명록을 찾으실까요? 오래된 방명록은 아마 학과실 책장에 꽂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1999년도 학과방명록을 찾고 싶어요. 이름은 둘기네집이구요.”

“아, 1999년도라면 아마 뒤져보면 있을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학생은 학과실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황갈색 원목으로 짜여진 책장으로 다가가더니 책장에 진열되어 있는 책과 노트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낡은 노트 한 권을 발견하여 먼지를 툭툭 털더니 나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그토록 찾던 둘기네집은 오랜만에 세상빛을 보았다.


“혹시 이 노트 말씀하시는 걸까요?”

“네, 맞아요. 감사합니다.”

    

 둘기네집을 받아 들자 어린 시절에 숨겨둔 보물을 찾은 듯한 감동의 물결이 밀려 왔다.  훑는 듯 몇 장을 넘겨보았다. 후배들은 내 옆에 서서 나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지만 난 크게 괘념치 않았다. 수남이의 글씨는 그동안의 세월을 머금고 예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카푸치노에 대한 단상'이란 글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내가 남긴 꼬리글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그 시절 수남이와 함께 한 행복했던 장면들이 부분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캔을 흔들면 카푸치노가 될 거라며 수남이에게 캔커피를 건넸던 등나무 아래에서의 유치했던 스무 살이 떠올랐다. 몇 페이지 더 넘겨 보니 내 상처를 치유해 줬던 수남이의 글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난 수남이가 글로써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 주는 의사가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의 글을 통해 난 회복되어 갔고 상처뿐인 과거와 영원한 단절을 위해, 어찌 보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선주라는 이름을 버리고 지안으로 개명한 것이니까. 지안이란 이름에 담긴 의미 그대로 평안함에 이르고 싶었으니까. 얼마 전 만난 수남이의 모습은 내가 그토록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가 기간제 교사라서 실망한 건 절대 아니었다. 다만 수남이가 자신의 글에 대한 가치와 힘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음에 실망했었다. 그래서 이 둘기네집은 반드시 수남이가 다시 읽어야 한다.

       

“혹시, 이 학과방명록, 잠깐만 빌릴 수 있을까요? 꼭 필요한 사람이 있어서요.”     

 

 남자 후배는 자신이 그 무언가를 결정할 힘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슬그머니 과회장 후배의 눈치를 봤다. 과회장 후배는 학과방명록의 성격을 잘 모르는 듯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남자 후배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학과방명록이 오래전에 사라진 전통이긴 해도 나름 우리 과의 유서 깊은 물건이라 그동안의 학과방명록을 폐기하지 않고 보관하고는 있었는데요. 솔직히 저희들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가져가세요. 선배님.”     


 갑자기 과회장 후배가 나서더니 선뜻 둘기네집을 내어 주겠다고 말했다. 남자 후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과회장 후배를 바라봤다. 나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 대처를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과회장 후배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과회장 후배가 담담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혹시 어떤 용도로 사용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돌려주신다고 약속해 주시면 빌려가셔도 될 것 같아요. 선배님 성함과 근무하고 계시는 학교만 남겨주신다면 신원 보증이 됐다 치고 빌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 99학번 정선주, 아니 이젠 개명해서 정지안이구요. △△여자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정선주 선배님??? 혹시 당시 임용고사 지역 수석으로 합격하신 선배님이세요?”

“부끄럽네요……․그런데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강의 시간에 가끔 교수님들께 전해 들었어요. 우리 과에 전설적인 선배님이 한 분 계시다고.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은데 공부마저 잘해서 당시에 지역 수석으로 임용고사 합격하셨다고요. 선배님 이후론 그런 인재가 나오질 않는다며 교수님들께서 한심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셨거든요. 오늘 그 전설적인 선배님을 만나 뵙게 되어 너무 영광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선배님께 임용고사 합격 노하우도 듣고 싶구요.”

“아, 그러셨구나. 언제든 초대해 주시면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네, 그럼 꼭 초대하겠습니다. 혹시 연락처를 받아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핸드폰 줘 보세요.”

     

 과회장 후배에게 연락처를 남기고 둘기네집을 신줏단지 모시듯 감싸 들고 학과실을 나왔다. 아깐 가볍게 훑어보았지만 집에 도착하고 나선 진지하게 둘기네집을 정독했다. 내 상처가 덧나지 않게 연고를 발라주는 듯한 수남이의 글들을 마주하니 그 시절의 감정들이 새벽녙의 아지랑이처럼 다시 솟아났다. 내 어두운 과거를 숨기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 밝은 척 살아왔던 정선주의 아릿한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수남이의 고백을 거절한 이후 수남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의 글들을 둘기네집에 써 왔었다. 당시는 수남이의 글에 아무런 꼬리글도 남기지 않았다. 내가 수남이를 힘들게 한 당사자였으니까. 난 그의 글에 꼬리글을 남길 자견이 없는 피의자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의 글에 꼬리글을 남기고 싶어졌다. 꼬리글을 통해서라도 스무 살의 변수남과 마주하며 세월을 초월한 대화를 하고 싶었다. 십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스무 살의 수남이가 남긴 글에 서른세 살의 정지안이 꼬리글을 남겼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다음날 학교에 출근하고 잠시 외출을 내어 우체국에 들렀다. 수남이 학교 주소로 둘기네집을 부쳤다. 수남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가 이것을 보낸 의도를 그는 알아차릴까. 수남아, 나 이제라도 너랑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어. 그때는 내가 너에게 다가갈 자격이 안되었나 봐. 사실 너무 무서웠어. 너로 인해 내 마음의 고름이 다 씻겨나간 줄로만 알았는데 그 악마 같은 인간을 마주하니 다시 냄새나는 새 고름이 뭉쳐왔었던 거야. 그 악마가 내 곁에서 배회하는 한 난 너와 사랑을 시작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이젠 괜찮아졌어. 그 악마 같은 인간을 어느 분께서 단죄해 주었거든. 몇 년 전이었던 거 같아. 뉴스를 통해 그 악마가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지옥에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악마를 단죄한 분 역시 악마라고 손가락질을 해댔어. 하지만 난 악마를 단죄한 사람을 직접 찾아뵙고 싶었어. 수십 번을 망설이고 고민한 끝에 결국 그 사람을 찾아갔었어. 많이 두렵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지만 찾아뵙는 게 그분에 대한 예의를 갖추거나 속죄하는 방법 같았는지도 모르겠어. 만나 보니 악마 같은 사람이 아니란 게 느껴졌어. 너무나 평범하고 평온한 얼굴이었고 얼굴 기색에서는 어떤 악의도 찾아낼 수 없었어. 그 사람이 기자들을 향해 절규하듯 외친 것처럼 그 사람 역시 나처럼 악마한테 상처를 안고 있던 사람이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고맙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머리를 조아렸어. 그 사람도 처음엔 낯선 사람의 방문이 어리둥절했겠지만 내가 쏟아내는 눈물방울들을 보고 대략 내가 겪었던 과거와 상처를 이해하는 듯한 얼굴이었어.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더 묻지 않고 그저 울고 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더라고.      


 그날 이후 바로 개명을 했어. 이제 과거의 정선주가 아닌 현재의, 미래의 정지안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어.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지만 난 끝까지 밀어붙였어. 이젠 그 지옥 같은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끈질기게 부모님을 설득했어. 결국 아버지, 어머니 둘 다 백기를 드셨어. 정선주가 아닌 정지안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그러니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예전에 네가 내 아픈 곳을 따스히 감싸준 것처럼 이젠 서로의 행복을 따스하게 그려 나가고 싶어. 고집스러울 정도로 순수한 내면세계를 가지고 있는 스무 살의 변수남을 다시 만나고 싶어. 네가 쓴 글을 다시 읽고 싶어. 예전 모습 그대로 내 곁에 다가와줘. 그리고 머물러줘. 그리고 날 용서해 줘. 차갑게 널 버렸던 나쁜 년을, 냉정하게 널 걷어차 버린 나의 모든 과거를 용서해 줘.

      

 진학부장이라는 업무 특성상 수능날이 다가올수록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지속되었다. 둘기네집을 보낸 이후로 수남이에게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고 수남이에게서도 별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가 둘기네집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궁금했지만 꾹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어떤 식으로든 답변이 올 것이라는 묘한 확신도 있었다. 세월은 무심히도 바쁘게 지나갔다. 수능도 끝났고 이젠 2학기 업무도 거의 종료가 되는 상황이었다. 수남이에게서도 별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동안은 방학 기간 동안 한 주나 두 주 정도 유럽 쪽으로 해외여행을 갔었지만 올해는 도저히 해외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피곤했다. 막연한 생각이긴 해도 혹시 해외로 나가 있는 사이 수남이에게서 연락이 올 수도 있다는 헛된 희망이 나의 여행 계획을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재충전의 시간은 필요했다. 그래서 국내 여행을 계획했다. 내 분신과도 같은 수첩을 꺼냈다. 인생의 중요한 타이밍마다 꺼내 들었던 수첩이다. 그 수첩엔 수남이와의 추억이 풋풋하게 담겨 있었다.      


‘어쩌면 너란 존재는 신이 내게 주신 선물이 아닐까. 그만큼 벌 받았으니, 이젠 선물을 줄 차례야,라고 신이 말하는 것 같아. 고마워 변수남. 나에게 닿아 줘서.’     


‘그보다 먼저 카페에 도착해서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그가 고백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칫국부터 마신 것일 수도 있지만, 그가 고백한다면 그 고백을 받아주고 싶습니다. 제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상처와 분노와 절망의 마음들이 그를 통해 회복...’     

     

 그래. 난 수남이를 진심으로 좋아했고, 수남이는 나에게 고백을 하려고 했었지. 스무 살의 정선주가 끄적였던 메모들을 보니 말라 있던 가슴이 뭉클하게 젖기 시작했다. 닿을 수 있었지만 닿지 못했던 인연, 아직 못다 한 우리들의 이야기. 이 이야기의 끝엔 수남이가 웃으면서 서 있을까. 수첩에서 얼마 남지 않은 빈 페이지를 찾아 메모를 남겼다.    

 

‘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아니면 누가 기다리고 있는 걸까?

끊어졌던 미완의 이야기는 완성될 수 있을까?

다시 널 만나게 된다면 그땐 내가 먼저 너에게 다가가고 싶어.

내가 가는 길의 그 어딘가에서 웃으면서 날 기다려줘. 그리고 내 손을 꼬옥 잡아줘.’

     

 솔직한 심정 그대로를 고스란히 글에 담았다. 언젠간 다시 마주치는 날이 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어.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우린 다시 그때의 스무 살처럼 다시 만날 날이 분명 올 거야.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어갈게. 너도 조금씩 나에게 다가와줘.      


 여행을 가겠다는 결심만 품어두고 구체적인 여행 계획은 짜지도 못한 채 방학을 맞이했다. 당장 뭘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아 일주일쯤은 백수처럼 집안에서만 뒹굴었다. tv를 봤다가 책을 읽었다가, 혹은 아직 덜 쓴 생활기록부도 끄적거려 보다가, 저녁엔 친구들을 만나서 가볍게 맥주 한 잔 하며 수다를 떨었던 게 지난 일주일 동안의 일상이었다. 어느 날, 늦은 점심을 먹고 소파에 기대앉아 tv를 켰다. 리모컨으로 여러 채널들을 이리저리 의미 없이 돌리고 있었는데 박해일, 신민아 주연의 <경주>라는 영화가 절반쯤 상영되고 있는 중이었다. 의미 없는 채널 돌리기를 멈췄다. 그리고 영화에 푹 빠져들었다. 두 주인공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기류가 나에겐 설렘의 도파민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스무 살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고백을 준비하던 수남이와 만났던 그 카페. 난 거기서 수남이에게 경주에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수남이도 그럼 같이 가겠냐며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었다. 경주를 가야한다는 명분이 마련되었다. 비록 수남이 없이 혼자 가는 여행이지만,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곳에서 수남이를 만날 수도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내 마음 안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경주까지는 당일치기로 갔다 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기에 바람도 쐴 겸 1박 2일의 가벼운 짐을 꾸려서 경주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무작정 차를 몰았다.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그렇게 국내 여행은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 간신히 경주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해 놓은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 곧장 동궁과 월지로 향했다. 이곳이 야경이 멋지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왕 저녁 무렵에 경주에 도착한 이상 그곳에 가봐야겠다고 맘먹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떤 이끌림 때문이었거나.


 동궁과 월지로 차를 모는 동안 내 마음속에선 원인 모를 두근거림이 계속 울려 댔다. 경주라는 낯선 도시가 주는 이질감이거나 여행 자체가 선사하는 특유의 설렘쯤이라고 치부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동궁과 월지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 소리는 내 귀에 들릴만큼 확연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동궁과 월지에 도착하니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하릴없이 주차장을 몇 바퀴를 빙빙 돌았는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를 놔두고 오는 게 현명했다. 도무지 주차 자리가 나오지 않아 그냥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마침 차 한 대가 빠져나가는 광경이 보여 다른 차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 재빨리 그쪽으로 차를 몰아 서둘러 주차를 마쳤다.

 

 매표소엔 이미 티켓을 끊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십여 분쯤 기다린 후 티켓을 끊어 정문으로 입장했다. 아무래도 방학이라서 그런지 가족 단위의 여행객이 많았고 그다음은 연인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커플들이었다. 나처럼 혼자 여행온 듯한 사람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혼자서 여행 온 듯한 사람들은 궁상맞아 보일 수 있는 나의 여행에 작은 위로가 되었다. 입구를 통과하고 몇 발걸음이나 걸었을까. 원인 모를 두근거림의 이유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출구 쪽에서는 그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달빛은 우리 둘을 향해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쏴주는 것 같았다. 운명이라는 이름의 스포트라이트. 나는 그에게서 밝은 달빛을 떠올렸다. 우린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며 서로에 대한 거리를 좁혀 나갔다. 스포트라이트 달빛 아래 그는 더욱 눈부시게 존재했다. 서로에 대한 거리가 숨소리가 들릴 만한 위치까지 좁혀져 왔다. 부끄러움을 타는 체질이 아닌데 부끄러워하며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변수남.”


 부끄러움을 타는 체질의  역시 부끄러워하며 맞인사를 건넨다.


“안녕, 정선주.”      


닿을 수 없을 듯한 운명을 거스르고 우린 지금 서로에게 닿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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