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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Aug 21. 2024

<돌고 돌아 다시>

대관람차에서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네?”

“제 이름은 정선주가 아니라 정지안입니다.”

“아, 네. 정지안 씨...”     


 동궁과 월지 출입구에서 수남과 지안은 더 이상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수많은 방문객들의 들락날락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출입구 쪽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구경 다 하고 나오는 길이야?

“응. 둘러보고 나오는 길이긴 한데...”

“그래? 그럼 이대로 나갈 거야?”

"응?"

"나는 이제 들어갈 건데 넌 나갈 거냐고."

“글쎄..."

“바쁘면 나가도 돼. 불잡진 않아.”

“아니야. 같이 둘러보자.”

“같이 둘러보자고? 그냥 너는 나갈 거냐고 물어본 거뿐인데?”

“으, 응?”

“농담이야. 같이 둘러보자. 사실 혼자 둘러보는 일이 뻘쭘하기도 해서. 자, 앞장서.”     


 그동안 둘을 갈라놓았던 시간과 감정의 괴리 따위는 이슥한 밤안갯속으로 들어가 버린 듯했다. 지안은 스무 살의 그때처럼 수남이에게 애정 섞인 장난을 쳤고, 수남은 여전히 지안의 장난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둘은 서로에 대한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한 채 나란히 동궁과 월지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인파에 섞여 있었지만 달빛과 별빛 아래 그 둘은 유독 빛나 보였다. 둘 사이엔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겨울의 서늘한 바람이 그 기류를 몽땅 걷어가는 듯했다. 싸늘할 수도 있는 날씨였지만 따사로운 공기가 둘을 감싸고 있었다.  


“잘 지냈어?”

“나야 늘 바쁘게 지냈지? 넌?”

“난, 얼마 전 학교 그만뒀어.”

“갑자기? 왜?”     


 학교를 그만뒀다는 수남의 말에 지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왠지 수남이 학교를 그만둔 이유를 어슴푸레 알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을 정도로 바보스러운 수남이라면 충분히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지안은 생각했다. 둘은 사람 숲을 비집으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수남은 맘속에 품고 있었던 생각을 지안에게 하나씩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세월의 단절은 스무 살의 수남과 지안을 갈라놓을 수 없었다. 스무 살 때처럼 둘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 다시 글을 써보려고 해.”

“그랬구나.”

“네가 나한테 둘기네집을 보낸 이유가 이것 때문 아니었어?”

“그렇긴 하지. 눈치가 하도 없어서 모를 줄 알았는데 어찌 용케 알아냈네. 그런데 학교까지 그만둘 줄은 꿈에도 몰랐어.”

“사실 학교 생활이 지치기도 했고,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기분도 들었었어. 이왕 글을 써보기로 결심한 이상 진지하게 시작해 보려고. 일단 쉬면서 책을 많이 읽어야 할 것 같아. 훌륭한 소비자가 아니면 훌륭한 생산자가 될 수 없는 것이 이 세계 생태거든.”

“조금 멋져 보이네. 변수남. 그런데 이제 와서 그 길을 걷는 게 두렵진 않아?”

“두렵지. 당장 밥줄이 끊겨 버렸는데. 하지만 처절하게 노력해 봐야지. 내 몸 건사하면서 굶어 죽지 않으려면 책도 열심히 읽고 간절하게 글도 써봐야지.”


 수남의 결심을 듣고 나서 지안의 얼굴엔 가벼운 화색이 당도가 덜한 복숭아빛처럼 돌았다. 다만 어두운 밤이라 지안이 머금고 있는 미소가 수남의 눈에 띠지 않았을 뿐이다. 지안의 맘속엔 폐업했던 단골 맛집이 리뉴얼해서 개업한 느낌 비슷한 기분, 존경했던 선생님이 퇴직하신 후 다시 시간 강사로 학교 현장에 복귀하신 느낌 비슷한 기분이 뭉클하게 찾아왔다. 하지만 수남의 꿈을 다시 되찾아 준 일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일조를 한 것 같은 뿌듯함이 지배적인 감정이었다. 지안은 수남의 글이 반드시 세상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글은 세상 사람들의 맘속에 깊이 스며들어 그들의 메말라 버린 마음의 갈증을 풀어주거나 상처를 치유해 줄 것이 분명하다고 지안은 굳게 믿고 있었다. 둘레길을 반쯤 돌았을 때 지안은 새로운 화제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여자 친구는 있어?”     


 문득 지안의 맘속엔 수남에게 혹시라도 여자 친구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불현듯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변수남 자체만 놓고 골몰하느라 혹여 그에게 여자 친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지안은 내심 수남의 입에서 ‘없어’라는 단호한 대답이 들려오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없어. 넌?”     


 다행히 수남의 입에서는 지안이 원하는 대답이 무심결에 흘러나왔다. 다시 되묻는 수남의 질문에도 지안은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스무 살의 그때처럼 장난을 치고 싶었다.     


“나도 없지. 그동안 연애도 안 하고 뭐 했냐?”

“연애에 대한 기준점이 남들과 다르달까?”

“응?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야. 그냥 능력이 없어서 못 했다고 해.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긴.”     


 지안은 오랜만에 들려오는 수남의 엉뚱한 대답이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피어오른 봄꽃 같았다. 지안은 스무 살의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수남을 떠올렸다. 그때도 그는 엉뚱한 대답으로 지안의 얼굴에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었다. 지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수남은 여전히 지안의 미소를 발견 못하고 있었다. 지안은 수남을 계속 바라봤지만 수남의 시선은 대부분 앞서 가는 사람들의 뒤꽁무니나 연못 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안은 수남이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원했지만 수남의 시선은 좀처럼 지안에게 직접적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연애란 말이야. 다소 이상하게 들릴진 몰라도, 적어도 나한테는 상대방을 좋아하는 마음이 100%여야 된다고 생각해. 어설프게 90%의 호감만 가지고도 그 사람을 만날 수야 있겠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10%의 마음이 어느 순간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거든. 그렇다고 그 사람도 나에게 100%의 마음을 쏟아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야. 그 사람이 날 80% 좋아하든, 90% 좋아하든 난 그 사람이 나한테 실망해서 내 곁을 떠나가고자 한다면, 내가 지겨워서 이별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상처는 나만 받아도 되니까. 난 그 사람에게 상처 주기 싫으니까.”      


 수남의 연애관을 들은 지안은 그가 여전히 바보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살면서 사랑을 하다 보면, 물론 100% 완벽한 감정으로 연애를 시작하지 않더라도 만나면서 부족한 부분들이 점차 채워지며 결국 100%의 감정을 이끌어 낼 수도 있는 건데 수남은 시작부터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비현실적 연애론자였다. 하지만 변수남이라면 충분히 그런 사랑을 꿈꿀 수도 있겠다는 개연성은 이미 둘기네집에 담긴 그의 글들에 담겨 있었다. 수남은 아직까지 사랑이란 감정에 순수와 낭만의 옷을 입힌 채 그 옷들이 벗겨지지 않도록 단추를 단단히 걸어 잠그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100%의 감정을 가지고 시작하는 연애가 어딨냐? 감정이란 것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아냐, 분명 100%의 감정은 있어. 단지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야. 난 알아.”

“참내, 마치 100%의 감정으로 누군가를 좋아해 본 사람처럼 말씀하시네.”

“……․”     


 수남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지안은 약간 무안했다. 100%의 감정으로 누군가를 좋아해 봤다는 수남의 말에서 자신의 이름이 언급될 줄 알았지만 수남은 입을 굳게 다물고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을 기세였다. 지안은 한편으로 수남이 자기 말고 누군가를 또 좋아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녀가 수남이란 존재를 너무 자신만의 세계관에 가두어 놓고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편협한 생각이 찾아왔다. 둘레길도 3분의 2쯤 돌아서 곧 길이 끊길 것이다. 지안의 마음은 조금씩 초조해졌다. 이 둘레길이 끝나면 다시 언제 수남을 만날 수 있을지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지안은 수남의 표정을 살짝 엿보았다. 둘레길을 걸으며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궁금했다. 수남이 지금도 자신을 여전히 좋아하는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에게 다가가도 되는지. 그를 보고 싶어 했음에도, 이렇게 만나고 있음에도 지안은 그를 향한 감정의 갈피를 자꾸 놓치고 있었다.      


 결국 둘레길은 끝나고야 말았다. 수남과 지안은 이제 출입구 쪽으로 발길을 향하고 있었다. 저 출입구를 나가면 만남의 기약이 없을지도 모른다. 수남과 지안은 이대로 헤어지기는 싫은 듯 속도를 최대한 늦추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가 안 된 상태의 지안에게 수남이 먼저 말을 꺼냈다.     


“돌고 돌아 다시 여기네.”     


 돌고 돌아 다시 여기,라는 수남의 말을 듣는 순간 지안의 가슴속엔 형용할 수 없는 무언의 감정이 용솟음쳤다.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었고, 무엇인가가 심장을 향해 제발 문 좀 열어달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것만 같았다. 지안은 무언인가 생각난 듯 혹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수남이에게 말을 꺼냈다.    

 

“혹시 언제까지 경주에 머무를 예정이야?”

“글쎄,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놓고 온 건 아니라서. 며칠쯤은 더 머무를 생각이긴 한데...”

“그럼, 내일 12시에 놀이공원 대관람차에서 보자.”

“대관람차?”

“갑자기 대관람차가 타고 싶어졌어. 나와 줄 거지? 설마 나 혼자 대관람차 타게 할 정도로 매너가 없는 건 아닐 테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래서 나온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그래. 네가 타고 싶다면... 같이 타자.”

“잊지 마. 12시야.”


 출입구를 나오면서 둘은 내일을 기약하고 각자의 공간으로 헤어졌다. 숙소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지안의 제안을 수남은 혼자 더 가볼 곳이 있다며 끝내 뿌리쳤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달빛과 별빛이 유난히 밝은 밤이라고 수남은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도 지안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했다. 운전대를 잡은 지안의 손도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라디오를 트니 프랑크 시나트라의 <Can't Take My Eyes Off You>가 흘러나왔다. 지안은 무의식 중에 팝송을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다음날이 되었다. 아침의 신선한 기운은 세상을 싱그러운 공기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쌀쌀하지만 기분 상쾌한 온도에 가까운 날씨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함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수남은 나름 일찍 나온다고 서둘렀지만 지안은 이미 대관람차에 도착해 있었다. 수남은 머쓱해하며 지안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청바지에 아이보리색 면티를 입고 하얀색 운동화를 신은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수남은 그녀에게서 스무 살의 정선주의 체취를 느꼈다. 어젯밤 내내 수남은 그녀가 왜 대관람차에서 보자고 했는지 궁금했지만 결국 원하는 답을 못 얻고 잠을 설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와 그냥 그녀가 진짜로 대관람차를 타고 싶었는데 혼자 타기엔 뻘쭘해서,라는 지극히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일찍 와 있었네? 많이 기다렸어?”

“야, 넌 아무리 내가 만만한 대학 동기라지만 여성에 대한 에티켓을 너무 모르는 거 아냐? 12시에 보자고 했으면 30분 전엔 나와서 티켓도 끊어 놓고 뜨거운 커피라도 준비해 놨어야지.”

“미안. 내가 연애 경험이 없어서 여자의 심리를 잘 몰라. 늦었으니까 티켓은 내가 끊을게.”

“답답한 변수남 선생님. 티켓은 제가 이미 끊어 놓았습니다. 그냥 몸만 와주신 것만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마실 거라도……․”

“저기, 선생님. 마실 것도 필요 없으니까 일단 타시기나 하시죠?”     


 지안은 수남을 놀리는 일에 재미라도 들린 듯했다. 그녀는 수남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걸 보며 마음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장난에 당황으로 반응해 주는 수남이 티 없이 맑고 깨끗해 보였다. 지안은 수남을 재촉하여 안내 요원의 도움을 받아 대관람차에 탑승했다. 대관람차는 시계방향으로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좁디좁은 공간에 수남과 지안은 나란히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지안의 시선은 수남을 향했고 수남의 시선은 창 너무 먼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관람차가 9시 방향에 다다랐을 때였다. 어색한 공기를 깨고 지안은 호흡을 한 번 크게 내쉰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 말만 들어줘.”

“아무 말 안 하고 있었는데?”

“그냥 내 말만 들어줘. 관람차가 한 바퀴 다 돌 때까지만. 부탁이야.”

“……․”


 수남은 지안 주변의 공기가 바뀌어 있음을 인지했다. 평소답지 않은 진지함과 심각함이 그녀 주위를 흐릿하게 감싸고 있었다.


“나 사실 상처가 많았던 여자였어. 널 만나기 전에 내 몸과 내 정신은 가혹한 운명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어.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태연한 척, 밝은 척했던 것은 일종의 방어 기제였던 셈이지. 나 사실 사람들이 너무 무서웠고 세상이 너무 두려웠어……․”    

 

 수남은 그녀에게서 나오는 말들을, 그녀의 부탁대로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눈빛을 응시했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왠지 계속 그녀를 바라봤다간 그녀의 눈망울에 맺혀있는 물방울들이 떨어져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이미 아연을 통해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는 모르는 척 잠잠히 듣고만 있었다.     


 대관람차가 최정상인 12시 방향에 도착했다. 따사로운 햇빛이 둘의 얼굴에 눈부시게 쏟아졌다. 수남은 지안의 이마 위로 손지붕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햇빛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말을 이어나갔다.     


“나 사실 너의 글을 통해서 신비로운 체험을 했어. 어느 병원을, 어느 전문가를 찾아갔을지라도 낫지 않을 것 같았던 내 마음의 병이 너의 글들을 본 순간 서서히 낫고 있음을 느꼈어. 난 변수남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고, 별로 관심도 두지 않은 그저 그런 사람이었는데 묘하게 너의 글들은 내 쓰린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어. 점차 상처가 회복되어 가니 너에 대한 호감의 감정이 은밀히 찾아왔고,  그 호감이 쌓이고 쌓여 결국 사랑이란 감정으로까지 번지고 말았어. 나 너 좋아했었어.”     


 지안은 더 이상 수남이의 눈빛을 바라보고 말할 용기가 사라진 듯했다. 관람차의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안은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과거와 그녀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수남은 왜 십수 년 전 그날에 지안이 미르 연못으로 나오지 않았는지, 자신의 고백을 걷어찼는지 궁금했다. 지안도 아니, 그 시절의 선주도 자신을 좋아했었으면 왜 자신의 어설픈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안의 부탁대로 잠자코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대관람차가 3시 방향에 당도했다. 수남은 곧 있으면 대관람차 운행이 종료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안의 얘기도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너의 고백을 못 받아줘서 미안해. 사실 그때는 받아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 넌 너무 깨끗한 사람이고 난 더러운 여자였으니까. 어리석게도 나 따위 것이 네 곁에 머물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어. 이해가 안 되더라도 이해해 줘. 그만큼 너를 좋아해서, 나로 인해 네가 힘들어질까 봐 주저하고 망설였었어.”  

   

 수남은 내면의 목소리로 ‘아니야!!’라고 단호하게 외쳤다. 그녀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과거를 가졌든 자신이 사랑한 건 그녀의 외부적인 상황, 사건 따위가 아니라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그녀의 새하얀 미소와 외로웠던 변수남을 포근하게 안아주었던 그녀의 손길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너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고 외치고 싶었다. 수남은 이제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고, 평범하게 살아도 된다고,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그녀에게 간절하게 말하고 싶었다.      


 대관람차는 돌고 돌아 다시 탑승구였던 6시 방향으로의 도착을 앞두고 있었다. 지안의 입술을 굳게 악물고 있었다. 아직 못다 한 중요한 말을 입안에만 머금고 차마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수남은 그런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어떤 말이 쏟아질까, 하고 생각하며 지그시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안은 눈을 한 번 지끈 감았다 뜨며 입술을 무겁게 열었다.   

   

“너무 늦었지만, 우리가 돌고 돌아 다시 이곳으로 왔듯이 너만 허락해 준다면 다시 우리의 과거도, 추억도, 그 스무 살의 감정, 너와 나의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어.”   

  

 수남은 전기 충격 의자에라도 앉은 것처럼 심장에 짜릿한 전류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지안의 입에서는 쏟아지는 말들은 봄의 호흡처럼 그의 심장에 박혀 녹아내리고 있었다. 심장이 요동치며 그녀를 위해 계속 간직해 왔던 그 마음의 방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위해 누구에게도 내어 주지 않았던 오직 그녀를 위한 방. 이제 그 방에 그녀가 조금씩 들어서고 있었다.

             

“널 좋아해 변수남. 나 널 좋아해. 나랑 만나 줄래?”     


 이윽고 관람차가 원래의 탑승구에 도착하여 안내 요원이 관람차의 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수남과 지안은 어쩔 수 없이 관람차에서 내려야 했다. 내리자마자 둘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지안의 입에서는 더 이상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수남이 답을 해야 할 차례였다.     


“나, 이제 백수야.”

“아니, 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나 볼 폼 없는 사람이야.”

“아니, 넌 내가 계속 바라보고 싶은 사람이야. 그리고 난 보여. 네가 번데기를 뚫고 나와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모습이.”


 수남의 표정엔 겉으로는 가늠이 안 되는 온갖 감정들을 모두 섞여 있었다. 지안은 초조하게 수남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남의 입에서 대답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남은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생각이 말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둘은 그저 묵묵히 걷기만 했다. 기다리다 못한 지안은 체념한 듯 장난스럽게 수남에게 말을 걸었다.


"나 차인 거야? 스무 살 때 복수 성공했네. 변수남."

"배고파."

"응?"

"배고프다고. 나 아침도 안 먹었어."

"넌 이 상황에 배고프다는 말이 그리 쉽게..."


 지안은 원하는 답변 대신 엉뚱하게 배고프다는 말을 건넨 수남에게 약간 골이 났다. 기껏 어렵게 고백했는데 대뜸 배가 고프다니, 라며 지안은 이해할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수남을 향해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수남의 말에서 지안의 마음은 사르르 녹아내렸다.


"돈가스 먹고 싶어."

"응?"

"돈가스 먹고 싶다고. 너 돈가스 좋아하잖아. 돈가스 먹으러 가자."

"넌 이 상황에 돈가스가 입에 들어가? 내 고백도 거절해 놓고."

"지금 배가 고파서 대답할 기력이 없으니까 일단 돈가스 먹으면서 차분하게 생각해 보고 답해 줄게."

"뭐야? 너 지금 날 상대로 밀당하는 거야?"

"지금은 너랑 그때처럼 돈가스가 먹고 싶어. 그뿐이야."


 그렇게 둘의 발길은 놀이 공원 안에 있는 푸드코트로 향하기 시작했다. 초조해 보이는 지안의 표정과 대조적으로 수남은 뭔가 생각이 정리된 듯 한결 가벼운 얼굴이었다. 사실 지안은 이미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수남이 돈가스를 먹자고 하는 말속에 담긴, 둘만이 알 수 있는 함의를. 돈가스는 둘만의 찬란했던 청춘의 어느 자락에 놓여 있는 바라볼수록 그리워지는 앨범과도 같았다. 지안은 수남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며 돈가스를 다 먹고 나서 그가 과연 어떤 식으로 고백에 응해줄까를 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둘이 그려 나갈 찬란한 미래를 막연하게나마 떠올려 봤다. 그와 함께하는 삶은 분명 가슴 벅찬 일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돈가스 가게를 나오는 순간 꼭 수남의 손에 손깍지를 끼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절대로 뗄 수 없는 손깍지를.


  놀이공원은 사람들의 환희와 공포스러운 비명 소리로 가득 찼지만 수남과 지안은 정적 속을 걷고 있었다. 특정할 수 없는 어딘가로부터 <Can't Take My Eyes Off You> 둘만의 배경음악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렴구로 나아갈수록 볼륨은 더욱 커져가는 듯했다. 수남과 지안의 손길닿을락 말락 살랑이며 흔들거리고 있었다.



다음 주에 마지막화 <에필로그>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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