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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May 02. 2024

<앙드레 지드> 1화

기형적인 나비

 다음 날 지옥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 98개의 CCTV를 피해 학교 앞 상가 건물 뒤에 은폐, 엄폐한 후 연거푸 두 대의 담배를 빠르게 피웠다. 흡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서류 가방을 열어 값싸고 성능 좋은 휴대용 향수를 몸 구석구석에 뿌린 후 불을 피우겠다는 원시인의 애타는 심정처럼 라벤더 향이 강한 핸드크림으로 양 손바닥을 마구 비벼댔다. 물론 입가심 가글도 잊지 않았다. 담배향을 겨우 지우고 교문 안으로 기세등등하게 입장했다. 오늘도 고된 하루의 시작이구나. 무거운 왕관을 쓴 것 같은 숙취를 안고 오전 수업 두 개를 겨우 끝냈다.


 오후엔 창체활동이 예정되어 있었다. 원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율활동을 하는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오늘은 그 시간에 교사를 대상으로 학교생활기록부 연수가 있다고 한다. 가뜩이나 몸이 무거웠기에 교사 연수 시간에 편하게 앉아서 적당히 눈치껏 졸며 오후의 나른함을 즐기면 된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들은 ‘우리끼리 서로 친해요’라는 걸 과시라도 하듯 끼리끼리 뭉쳐서 연수가 진행될 2층 세미나실로 하나둘씩 입장했다. 여자 선생님 몇몇은 교내 카페에서 바리스타 동아리 학생들이 만들어 준 드립 커피를 각자의 손에 전리품처럼 들고 있었다. 미래의 바리스타를 꿈 꾸며 만들었을 아이스아메리카노, 카페라떼, 카푸치노. 카푸치노라……. 훗, 스무 살의 내가 학과방명록에 끄적였던 싱그런 글이 떠올랐다. 이젠 카푸치노라는 말만 희미한 연기처럼 떠오르고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끄적였는지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아까부터 교사들의 입장을 스캔하고 있었던 교무부장 선생님은 모든 선생님의 입장이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의 전원을 켰다. 오른손바닥으로 마이크 윗부분을 몇 차례 조심스레 두드려 전원이 켜졌음을 확인한 후 오늘 연수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 연수를 진행해 주실 강사 선생님한테서 차가 막혀 조금 늦는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선생님들께서는 잠시만 자리에 앉아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연수 명부가 출입구 쪽에 비치되어 있으니 싸인을 안 하신 선생님들께서는 지금 싸인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른한 오후 13:30분부터 시작되는 학교생활기록부 작성법에 대한 연수는 강사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조금 연기되었다. 나는 수업 시간에 교과 선생님이 안 들어오길 바라는 학생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며 지금의 소박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10여 분쯤 흘렀을까. 13시 40분쯤, 세미나실의 출입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고르지 않은 호흡 소리를 섞어 죄송합니다, 라는 한마디를 세미나실에 살포하며 오늘의 강사 선생님이 입장했다. 점심으로 나온 돈가스를 배불리 먹고 나른해진 탓인지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던 찰나에 강사 선생님은 결국 오고야 말았고 난 냉혹하고 따분한 현실로 복귀했다. 연수 내용을 기록하려고 가지고 왔던 교무수첩을 펴서 필기할 준비를 서둘러 마쳤다. 잠의 중력에 의해 무거워진 고개는 그대로 책상 위에 펴져 있는 교무수첩 쪽을 향해 박혀있었다. 강사 선생님은 단상에 올라 가쁜 호흡을 가다듬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죄송합니다. 도로 공사 관계로 차가 막혀서 너무 늦었습니다. 선생님들 모두 바쁘시니 늦은 만큼 연수는 일찍 끝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늦게 온 만큼 연수는 일찍 끝내드리겠습니다.’ 연수에 늦은, 혹은 포퓰리즘으로 수강생들의 환심을 사는 강사들의 단골 멘트였다. 출강하는 강사들을 위한 강사 연수 때 다들 똑같은 내용을 배웠나 보다. 오늘도 그밥에 그나물 같은 강사가 왔겠다는 생각으로 무거운 고개를 들어 강사 선생님을 처음으로 응시했다. 어?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여자고등학교에서 진로진학부장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 정지안입니다.”


‘쿵’


 심장이 무너져내리다 못해 내 안에서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정지안 씨는 간단한 소개를 마친 후 준비해 온 PPT포인터를 가방에서 꺼내어 프로젝터 화면을 넘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가 남긴 말입니다. 학생들의 꿈을 위해, 입시를 위해 우리 교사들은 과연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요? 간단한 해법은 바로 학교생활기록부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정지안 씨가 아닌 그녀, 곧 정선주였다. 외모적으로 봤을 때 그랬다. 안 본 지 십여 년이 흘렀지만, 세월의 굴곡과 노화라는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녀가 분명했다. 정선주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정지안. 대학 때의 생글생글한 분위기는 어느덧 중후한 분위기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치더라도 가볍게 웃음을 흘릴 때 나오는 저 아름다운 눈매, 내가 십여 년 전에 봤던 그 눈매 그대로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딱 부러지는 화법. 내 기억의 늪에서 침잠하고 있던 그녀가 연꽃처럼 부유했다. 마치 죄인처럼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볼 수 없었다. 너무 보고 싶었지만, 그리웠지만, 애태웠지만 난 그녀를 당당하게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친한 친구로 남길 원했던 그녀에게 감히 흑심을 품은 죄, 당당히 정식 교사가 되어 출강까지 나가는 그녀에 비해 아직까지 위태로운 계약직 교사를 전전하고 있는 죄, 정말 그리워하면서도 아니 만나고 산 죄. 난 극악무도한 전과범이었다. 사랑의 결실이라는 무모한 역모를 꾸몄다가 덜컥 발각되고 만 대역죄인.     


 연수가 진행되는 와중, 그녀의 시선이 저 멀리 가 있는 찰나의 순간을 이용해서 그녀를 잠깐 바라보았다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려는 찰나에 소매치기처럼 초조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내가 의식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교묘하게 피했기 때문에 연수 시간 동안 우리 둘의 시선은 극적으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정지안 강사의 약속대로 연수는 금방 끝났다. 따분한 연수로 몸부리치던 선생님들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각자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정지안 씨도 부스럭거리며 준비한 자료들을 챙기고 있었다. 난 자리에 망부석처럼 앉아서 이후 행동 메뉴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선생님 인파 속에 묻혀서 무심하게 자리를 떠야 할지, 정지안, 아니 정선주 씨에게 다가가 십여 년 만에 반갑다는 인사를 해야 할지. 어느 쪽이든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떠날 채비를 마친 정지안 씨는 교무부장 선생님께 산뜻한 미소와 인사를 건넨 후 세미나실을 급하게 빠져나갔다. 난 아직도 행동 메뉴얼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선택 장애를 가진 사람처럼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어떤 결정이든 선택을 해야 했지만, 아니 솔직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억지로 일으키려는 내 몸과 마음을 만나지 못한 세월이라는 길고 긴 중력이 강압적으로 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날 알아볼까? 알아본다면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이런 나의 우유부단함은 그녀가 자신의 승용차를 끌고 교문 밖을 나갈 때까지 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와 대면했던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네 번째 변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학에 다닐 때는 서로 피해 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에 물리적인 접촉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고백에 실패한 이후 그리고 순정이가 죽은 이후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피해 다니기에 정신이 없었다. 자세히 돌이켜 보면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뭔지 모를 애처로움이 담겨 있었다. 마치 나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싶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속 좁은 내가 그녀와의 대화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애써 외면했고, 그녀와 최대한 안 마주치기 위해 발악을 하다시피 도피적으로 대학 생활을 했다. 그냥 부끄러웠던 것 같다. 내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우정을 가장한 흑심이 들통이 나버린 것처럼. 내가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어느 순간부턴 그녀도 내게 시선을 던지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서로를 향한 외면의 시간은 계속 흘렀다. 내 동의도 없이 아버지께서 입대 지원서를 넣는 바람에 난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끌려갔고, 그녀는 내가 군대를 갔다 온 사이 무사히 졸업을 했다. 그 어려운 임용고사도 한 번에 통과했다고 한다. 역시 동기 성적 1등은 이름값을 했다. 2년 2개월의 악몽 같은 군대 생활을 마치고 난 예비역 복학생이 되어 그녀 없는 학교생활을 해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바뀌어 있었다. 처음 보는 후배들이 나름 선배라고 격식을 차리고 대접을 해준다. 1학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이었는데 선배가 되어 보니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도, 책임져야 할 자리도 더 많아졌다. 군대를 가기 전엔 번데기마냥 나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더라면 제대 후엔 나름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나비가 되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날개는 전혀 돋아나지 않았다. 번데기는 벗어났지만 그저 기형적인 나비가 되어 넘어질 듯 세상을 뒤뚱거렸다. 관계를 많이 쌓은 듯했으나 관계의 깊이는 얕거나 진솔하지 못했고, 어느 누구도 문순정이나 정선주처럼 내게 멋진 날개를 달아주지 않았다.  

    

 기형적인 나비도 어느새 몸집이 훌쩍 커버려 졸업이란 것을 맞이했다. 졸업은 더 높이 날기 위한 통과의례이기보다 사회란 경쟁적이고 냉혹한 곳임을 알려주는 일종의 생존 테스트에 입성하는 것이었다. 첫해 임용고사에 아쉽게 낙방했을 때가 기억났다. 정말 임용고사 불합격은 곧 죽음이라는 인지구조를 내면화하여 대학교 4학년 때 있는 힘을 다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건만 돌아오는 건 1점도 아닌 소수점 단위에서 미끄러진 불합격 통보였다. 컴퓨터 모니터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불합격’이라는 말을 도무지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건 좌절과 절망이라는 마음이 창조해 낸 가상 세계일 거야, 어서 이 가상 세계를 탈출해야 돼, 란 생각으로 난 싱크대 위에서 날카로운 날을 번뜩이고 있는 식칼을 집어 들었다. 여동생이 야간 근무를 마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가상 세계 탈출 계획은 그만 수포로 돌아갔다. 울부짖는 여동생의 절규는 지금 처해 있는 세계가 가상이 아닌 현실임을 일깨워 주었다.      


 다시 시작해보자고 결의를 다지고 볼펜을 잡아봐도 당장 먹고살 궁리란 녀석이 반갑지 않게 찾아와 내 공부를 방해했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상 더 이상 부모님께, 직장을 다니고 있는 여동생에게 손을 내밀 순 없었다. 진짜 독하게 마음먹고 얼굴을 철면피로 위장하여 가족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고 치자. 그러다 또 낙방한다면?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만큼 임용고사는 수능시험과는 달리 점수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았다.    

    

 졸업 후 그녀를 처음 본 것은 대학 여자 동기의 결혼식장이었다. 난 군대를 다녀온 관계로 여자 동기들보다 졸업이 3년 정도 늦었다. 그러던 중 여자 동기 한 명이 운명 같은 남자를 만났는지, 속도 위반을 했는지 몰라도 꽤 이른 나이에 시집을 간다며 대학 동기들에게 청첩 문자를 돌렸다. 직업이 백수이고 취미가 임용고사 준비이다 보니 축의금을 낼 만한 여윳돈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직장에 다니고 있는 여동생에게 가까스로 5만원을 구걸하여 겨우 결혼식에 참석할 구색을 갖췄다. 대학교 4학년 시절 교생 실습을 나갈 때 사놓은 싸구려 냄새가 팍팍 나는 검정색 정장을 갖춰 입고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운명 같은 남자를 만나서 속도 위반을 한 여자 동기였지만, 난 선주라는 이름의 빛나는 보조 출연자의 참석 여부가 더욱 궁금했다. 사실 궁금하다기보다는 그녀를 마주칠까 봐 두려웠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그녀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결혼식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같이 참석한 남자 동기 몇몇과 식사를 하러 연회장으로 내려갔다. 백수라는 걸 과시라도 하듯 접시에 육해공의 진미들을 신라시대의 왕릉처럼 높이 쌓아 올렸다. 뷔페에 갈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뷔페에 비치된 접시는 뷔페에 차려진 음식의 양과 종류에 비하면 너무 작았다. 적당히 좀 먹으라는 것이겠지. 선주라는 이름의 보조 출연자는 그만 뷔페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 역시 동기 몇몇과 결혼식 본식에서 빠져나와 단아한 분위기를 풍기며 주로 풀떼기 위주로 접시에 담고 있었다. 탑처럼 쌓아올린 내 접시가 민망해졌다.  

     

 나와 그녀의 눈길이 서로에게 닿았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오랜만에 지인을 만난 것처럼 어색한 손바닥을 그녀 쪽으로 드러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평소 자주 보지 않는 친척 어르신을 대하듯 고개를 꾸벅이며 이내 시선을 차갑게 거뒀다. 그때가 가장 최근에 그녀를 만났던 기억이었다. 30대 중반을 통과하는 나이인데 당연히 결혼은 했을 테지. 했다면 아기들은 초등학생쯤 되어 있겠군. 누구랑 결혼했을까? 아름다운 미모에다가 지성까지 겸비했으니 ‘사’자 들어가는 남편을 만났겠지? 교회는 여전히 다니고 있을까? 그녀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미치도록 궁금했다. 난 정말 모순적인 인간이다. 대학 시절 때는 악성 빚쟁이처럼 도망만 다니더니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그녀의 지난 나날들이 궁금하다니. 잊으려면 확실히 잊어버리던가, 다가가고 싶었으면 다가갔으면 될 것을. 난 왜 이토록 모자란 녀석일까. 그녀에게 닿고 싶었지만 닿을 수가 없다.

    

 오늘 내 머릿속은 온통 그녀와의 만남으로부터 비롯된 혼란스러운 상념으로 가득 찼다. 수업을 다 마치고 종례까지 끝나서 슬슬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학교 현관문을 나가려던 찰나에 하필 윤리, 아니 CCTV를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CCTV는 이 시각에 가방을 싸 들고 현관문을 나서는 내 모습이 황당해 보인 듯했다. 먹이를 낚아채려 하는 맹렬한 독수리처럼 나에게 신속하게 접근했다.      


“변선생, 퇴근하려고?”     


 그럼 제가 출근하는 걸로 보이십니까?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퇴근 시간이 됐으니까 출근이 아닌 퇴근을 하겠다는 건데 뭐가 또 못마땅한 거지? 일단 상식적으로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다.     


“네, 선생님. 퇴근하려 합니다.”     


 CCTV는 나의 당연한 반응을 당연하지 않은 반응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기간제 교사가 칼퇴근을 하면 근무 평정에 불리해서 재계약이 안 될 수도 있다, 자기가 젊었을 때는 초과 수당도 안 받고 매일 야근을 하면서 교재 연구 및 행정 업무 처리를 했다, 다 자넬 위해서 건네는 조언이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성실하게 근무해라 등의 꼰대 같은 메시지를 내 가슴에 식칼처럼 팍팍 꽂아 넣었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운데 CCTV는 또 다른 차원의 혼란스러움을 맛보게 해주었다.  

    

 그럼 이쯤에서 CCTV는 진정 날 걱정해 주고 위해주는 교사일까? 답은 NO이다. 나도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 CCTV가 그동안 저지른 만행들에 대해선 내 가슴에 원수처럼 새겨 놓고 있었다. CCTV는 나 대신 다른 국어 기간제 교사가 정식이 되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에 대한 온갖 악소문을 직접 퍼뜨려서 반대급부에 있는, 소위 말하는 자기가 밀고 있는 교사가 정식 교사가 되길 바라는 내 반대급부의 핵심 세력이었다. 기간제 교사 따위가 무슨 정치 싸움에 휘말릴 게 있었겠느냐만 난 파벌도 없었고, 줄도 없었고 그냥 외롭고 고독하고 사랑도 못 해 본 불쌍한 변수남 그 자체였다. CCTV의 주옥같은 말씀들은 라인도 안 대고 있던 나에게 어디 라인이라도 대야 하지 않겠어, 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당당한 교사로 남고 싶었다. 정치적이니 파벌이니 이딴 것들은 내가 사는 세상에서 나랑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CCTV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듣고 난 당당히 퇴근을 했다. CCTV의 심기는 꽤나 불편해 보였다. 혼자 불편해하라지.     


 집에 오자마자 바른 생활 초등학생처럼 손발을 씻고 치카치카 양치질을 했다. 퇴근 후 자유를 만끽하면서 TV를 켠 후 자유롭게 송출되는 프로그램들을 의식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낚시 프로그램, 골프 프로그램, 연애 프로그램 등을 멍하니 흡수하며 낯선 땅에 와있는 이방인처럼 세상의 풍조를 익혔다. TV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자 난 책상 앞에 앉아 다음 날에 있을 수업 준비를 차분히 해 나가야겠다고 맘먹었다. 책상 위에는 괴기한 노트가 한 권 놓여 있었다. ‘브레인스토밍 노트.’ 아무리 술기운이 시켰다지만 이딴 노트를 왜 사 왔을까. 돈을 쓸데없이 허비했다는 생각이 내 술기운을 꾸짖고 있었다. 아마 술이 썼겠지만 노트의 첫 장에는 낯 간지러운 멘트가 개발괴발 적혀있었다.   

  

 ‘그녀가 너무 보고 싶다.’     


 좁은 집구석 따위에 있지도 않을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아무리 술을 마셨다 치더라도 이런 말을 에누리 없이 끄적였다니. 내 자아가 별다른 흥정도 없이 술기운에 졌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오른다. 술이 썼던 문장 위에 마구마구 덧칠을 해서 문장을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그 문장은 알 수 없는 신비한 방어력을 발휘해서 끝까지 생존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싶다는 문장은 어쩌면 내 무의식에 숨어 있는 은밀한 진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페이지를 넘겨 버리는 게 상책이다 싶어서 다음 장을 넘겨 새하얀 두 번째 페이지를 맞이했다. 순백의 페이지는 나를 향해 어서 브레인스토밍을 하라고 명령했다. 뭐라고 쓴다. 불현듯 X같은 CCTV가 생각났다. CCTV는 요즘 날 괴롭히는 재미를 퇴직 전 삶의 이유로 삼은 것 같았다. 내 볼펜은 순간 파괴의 신이 되어 노트의 두 번째 페이지를 흑빛 저주로 물들였다.


‘X같은 CCTV 꺼져버려.’      


 차마 현실에서는 못 내뱉는 말이었지만, 글에도 힘이 있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대학 시절에 ‘비속어 개론’이라는 강의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욕이라고 써놨지만 내가 생각해도 욕이라고 하기 민망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찰진 욕으로 상대방에게 팍팍 비수를 꽂던데. 비록 수위가 높은 욕도 아닌 비교적 건전하게 지껄인 짧은 문장이었지만 통렬한 감정이 묘하게 찾아오면서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로 브레인스토밍 노트는 CCTV를 저주하는 글로 채워질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상상이 들었다. 착한 저주 의식이 끝나자 맘 한쪽 구석에서는 저주 의식의 눈치를 보고 있던 또 다른 감정이 새롭게 움트기 시작했다. 맞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지. 정선주 같은 정지안 씨를 만났었지.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의 혼합체를 글로 단정할 수가 없었다. 최대한 생각을 가다듬고 내 마음에 자문을 구한 후 최종적으로 도출된 문장을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다.     


‘정지안, 당신은 누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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