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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Jun 12. 2024

<환락의 거리에서> 2화

고추짬뽕같은 휴가

 우리 1분대가 사격 우수 분대로 선정되어 4박 5일의 포상 휴가를 나가게 되었다. 중대장님은 분대 전술 사격 역량을 치하하며 통 크게 1분대 전체 인원이 한꺼번에 휴가를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분대 전체 인원이 한 번에 휴가를 간다는 것은 평소 같았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때마침 휴가 기간 동안 부대 자체적으로 특별한 훈련 일정이 없어서 운 좋게 가능한 일이었다. 중대장님은 모처럼 분대 전체가 나가는 휴가이니 분대 단합을 제대로 하고 복귀하라고 근엄하게 명령하셨다. 1분대장을 비롯한 1분대원 7명은 중대장님께 휴가 출발 보고를 마친 후 산뜻하게 위병소를 빠져나갔다. 박태웅 병장은 중대장이 분대 단합 차원에서 금일봉 봉투를 건네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위병소를 나서는 순간부터 계속 불만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난 4박 5일의 일정 동안 밀린 영화, 책들을 맘껏 보는 상상의 나래를 선임들 몰래 펼치고 있었다.


 부대 근방 지리에 익숙한 분대장님의 탁월한 통솔 하에 우린 파주읍에 소재한 허름한 간판의 중식당에 도착했다. 어느 때부터였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휴가 나온 2대대 장병들은 하나의 관례처럼 파주읍에 들러 한 중식당에 비밀같이 숨겨져 있는 고추짬뽕을 먹으며 본격적인 휴가의 시작을 알렸다. 메뉴판에도 없는, 단골들만 안다는 고추짬뽕. 청양고추 슬라이스가 폭탄처럼 얹힌 고추짬뽕은 육안으로 보기만 해도 땀구멍에 숨어 있는 땀이 삐질삐질 삐져나올 만한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다. 예전에 다녀온 100일 휴가나 일병 정기 휴가 때는 다른 소대 선임들과 휴가를 나오는 바람에 위병소에서 어색한 이별 경례를 나누며 각자의 길로 헤어졌지만, 오늘은 소대 분대원들과 함께 나가는 휴가이다 보니 분대장님은 분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우릴 자연스럽게 중식당으로 안내했다.


 얼마나 매울지 가늠이 안 돼 일단 짬뽕 국물을 숟가락 절반쯤 채워서 입안으로 조심히 넘겼다. 상상 이상의 매운맛이 혀 이곳 저곳을 마구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공포 그 자체였다. 나와 고추짬뽕의 매운맛 사투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분대장님은 괜찮냐는 걱정을 건넴과 동시에 중식당 직원에게 고량주 한 병을 주문했다. 술에 일가견이 있는 분대장님은 이 고량주의 이름은 이과두주라고 하며 상큼한 파인애플 향이 나는 깔끔한 술이라며 본인의 술 지식을 과시했다. 작은 고량주 잔에 담긴 이과두주. 고추짬뽕의 충격적인 비주얼과는 달리 육안으로 보기에 그저 투명하고 영롱한 색깔로 인해 진입 장벽이 높아 보이진 않았다. 술잔도 작디작았기에 자신감 있게 술잔을 들어 터프하게 술을 넘겼다.

      

“흡!”

     

 고추짬뽕이 10에 5 정도 되는 고통이었다면 이과두주 한 잔은 10에 7 정도 되는 고통이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뜨거운 알코올 맛. 식도가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술병을 들어 알코올 도수를 확인하니 무려 50도가 넘는 술이었다. 세상에 이런 걸 마신다고? 뜨거운 이과두주를 들이켜고 매운 고추짬뽕 국물로 속을 달랬다. 비록 뜨겁고 매운맛이 육체를 넉다운시켰지만, 오랜만의 휴가라는 선물로 인해 정신적으로는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얼른 집에 가서 감자칩과 시원한 이온 음료를 잔뜩 사서 먹고 싶었다. 감자칩과 이온 음료는 고된 행군 훈련 때 유독 생각났던 것들이었다.

     

 아무래도 감자칩과 이온 음료는 나중에 만나야 할 것 같다. 중국집 회동이 거의 끝나갈 무렵, 몇몇 선임들의 주도하에 우린 지하철을 타고 서울 모처로 넘어갔다. 휴가 첫날이니 우리만의 의미 있는 추억 쌓기가 필요하다며 데리고 간 곳은 이름도 모르는 동네에 박혀 있는 pc방이었다. pc방에서 어떤 유의미한 추억이 쌓이겠냐만은 나는 상병, 병장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일병이었다.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휴가 나온 군인들은 전투모를 힙하게 빗겨 쓰고 전쟁 게임을 즐겼다. 대학교 1학년 시절의 추석 즈음 생의 마감을 얼마 안 남긴 순정이와 함께 했던 그 게임이었다. 나의 영웅 같은 활약으로 연거푸 승리를 거두니 선임들은 부대에서는 그리도 아꼈던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야, 변수남이. 너 사회에 있을 때 게임 좀 했네?”

“일병, 변수남. 아닙니다. 조금 할 줄 압니다.”

“보통 실력이 아닌데? 프로게이머 해도 되겠어.”

“아닙니다. 많이 부족합니다.”     


 입대해서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이란 걸 받아봤다. 비록 군 생활이 아닌 게임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지만 어쨌든 인정이란 건 언제 받아도 기분 좋았다. 슬슬 게임이 지겨워지자, 우린 또다시 술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한 놈도 집에 가지 마라잉. 내일은 없는 것처럼 즐기는 거야. 알것냐?”  

   

 술을 거하게 마신 박태웅 병장은 부대 밖에서까지 분대원들에게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남용했다. 난 박 병장이 참 불쌍하고 외로운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은 사람도, 그리운 사람도 없는 게 뻔하다. 그러니까 애꿎은 후임들만 잡아다가 왕놀이하고 싶은 것이겠지. 한 가지 이상한 건 분명 박 병장은 본인의 입으로 서울 출신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는데 가끔 내가 사는 지역의 말투와 어조가 툭툭 튀어나온다는 점이다. 물론 평상시엔 대부분 서울말을 썼으나 오늘처럼 술이 거하게 들어가니 로컬 사투리가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박 병장의 말투가 어떠하든 지금 중요한 건 어서 빨리 박 병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1분대장님도 계급은 병장이었지만 박 병장보다 2호봉 아래의 후임이라 날뛰고 있는 박 병장을 크게 제지하진 않았다. 오히려 술에 취한 박 병장이 혹여 부대밖에서 민간인에게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분명 진상 같은 선임일 텐데 1분대장님은 박 병장에게 늘 격식을 갖췄고 그를 배려해 주었다. 아마 지옥 같은 후임 시절을 함께 버텨낸 전우애 비슷한 감정이지 않을까.


 하루는 불침번 근무를 서다가 그날 당직 사병인 1분대장님과 짧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1분대장님은 예전 자신과 박 병장의 후임 시절 이야기를 짤막하게 들려줬다. 비상식과 폭력이 지배하던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고 1분대장님은 당시를 증언했다. 분대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박 병장이 평소 입버릇처럼 떠들던 "나 땐 너희들보다 더 심했어. 새끼들아."라는 말을 간접적으로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고통의 정도가 크든 든 내가 박 병장한테 가혹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정도의 차이가 크든 작든 폭력은 절대 용인될 수 없는 비상식적 행위였다.


 박 병장은 난폭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성욕 또한 남 달랐다. 어느 날 박 병장과 함께 야간 초소 근무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박병장은 날 초소 밖에 세워두고 당직 간부가 오나 안 오나를 경계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사생활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군대라는 곳에 갇혀 있다 보니 마땅히 성욕을 분출할 데가 없었나 보다. 박병장은 야심한 밤, 날 초소 밖에 세워놓고 본인은 초소 안에서 성적인 자기 위로를 거칠게 해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침 휴가를 나온 박 병장은 묵혀둔 자신의 성욕을 분출할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날 걸고넘어진 거지?

    

“변수남이. 너 여자랑 자 본 적 있어? 없어?”

     

 사랑도 못 해 본 내가 여자랑 잤을 리가 있나. 박병장에게 있는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직 없습니다.”      

“이 새끼가 부대 밖이라고 이젠 선임이 불러도 관등성명도 안 대네?”

     

 아차. 아무리 술을 먹었다 치더라도, 부대 밖이긴 해도 선임이 부르는데 관등성명을 안 대다니. 난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박 병장이 내뱉은 말은 예상 밖의 언어였다.

    

“괜찮아, 괜찮아. 부대 탈출하면 다 형동생이지. 안 그래? 그나저나 우리 수남이가 아직 총각이니까 오늘 수남이 총각 딱지나 떼어주자. 한 놈도 빠지지 말고 다들 따라와라잉.”

     

 박병장은 내 총각 딱지를 걱정해 주는 게 아니라 본인의 성욕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핑계를 댄 것일 뿐 실은 본인이 환락가를 가기 위한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델 혼자 가면 되지 왜 애먼 사람들을 끌어들일까. 우린 그 누구도 박 병장의 명령에 거역을 하지 못하고 미아리 텍사스촌으로 향했다. 단 1분대장인 신중호 병장은 집에서 급한 전화가 왔다는, 거짓말 같은 변명을 남기고 환락의 무리에서 이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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