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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May 29. 2024

<그녀라는 1인칭> 3화

더러운 년

 어느새 우린 오래 사귄 친구처럼 함께 어울리는 나날들이 잦아졌다. 가끔 순정이가 우리를 향해 시기하는 눈빛을 레이저처럼 쏘아댔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치 없는 수남이는 순정이가 건네는 시선도 전혀 모르는 눈치다. 에휴, 가르칠 게 너무 많은 녀석이야. 하지만 지들이 연인 사이도 아니고 뭐 시기하면 어쩔 건데. 아, 그렇다고 수남이와 내가 연인 사이란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린 그저 서로에게 점차 가깝게 닿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야기의 코드도 맞고, 가끔 건네는 수남이의 농담도 내게 큰 웃음을 주었다. 별것도 아닌 농담인데 난 왜 수남이의 농담이 그리 좋은지, 자세한 이유는 나도 내 웃음코드에게 묻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제일 기다리는 시간은 수남이와 함께하는 영화 관람이다. 수남이와 물리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손이 닿을락 말락 하는 옆자리에 수남이가 앉아 있다는 게 좋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스크린에 흠뻑 빠져 있는 수남이의 옆모습을 흘겨보면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영화 비평 논문을 쓸 것도 아니고 무슨 영화를 저리 진지하게 보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수남이의 모습은 한없이 순수해 보였고 그저 귀여웠다. 영화 관람이 끝나면 근처 카페에서 영화에 대해 평론가처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수남이의 모습, 그의 비평에 반론을 제기하자 더욱 열변을 토하는 수남이의 모습, 여자 주인공이 예뻐서 영화에 푹 빠졌냐는 나의 농담에 토마토처럼 얼굴이 벌거지는 수남이의 모습, 그의 모든 모습들은 내 추억의 앨범 속에 차곡차곡 소중하게 쌓여만 갔다.      


 진정 마음으로 바라면 이루어지는 것일까? 추석 명절이라 수남이를 볼 수는 없었지만 어떻게 지낼까, 고향에는 잘 내려갔을까, 하며 얄궂은 심장이 내게 수남이의 근황을 귀찮게 물어왔다. 그래서 수남이를 떠올렸다. 잘 지낼까? 고향은 내려갔을까? 보고 싶다? 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내 허락도 없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홍당무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양 손바닥으로 붉게 타오른 두 뺨을 부끄럽게 감싸며 진정시켰다. 이 감정은 뭐지? 나 정말 수남이를 보고 싶어 하는 거야? 설마 나 수남이를 좋아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사랑은 이성이 아닌 감정의 끌림이 중요하다지만 지금 수남이를 향한 이 감정이 사랑의 감정이라고? 내 인생에 다신 사랑 따위는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토록 사랑이란 감정을 내 삶에서 억지로 밀어내고 싶었는데, 지금 내가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다니. 말도 안 돼. 그런데 난 수남이에게 사랑받을 자격이나 있을까? 그는 순수하고 무결한 존재인데, 나는 짐승 같은 인간에게 순결이 짓밟힌 멍투성이였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던 멍자국들이 수남이를 만난 이후부터 서서히 옅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수남이를 통해 깨끗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가능할까. 나 같은 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러던 와중에 수남이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할 얘기가 있다고 당장 저녁에 보자는 내용이었다. 명절인데 급작스럽게 보자고 하다니,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나.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 중요한 건 수남이를 보고 싶어 하는 나의 바람이 수남이에게 닿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흔쾌히 수락의 답장을 보낸 후 어서 약속 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야속하게 시간은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TV를 봐도 시간은 장난처럼 느릿느릿 흘러만 갔다. 침대에 온몸을 내던지고 수남이가 어떤 말을 할지 브레인스토밍을 해보기도 했다. 명절에 급하게 만나자고 한 건 분명 긴박한 사안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둘 사이에 나눌 수 있는 긴박한 사안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급하게 돈이 필요할까, 아니면 설마 고백? 고백이라는 단어를 연상하니 벌써 마음이 쿵쾅쿵쾅 반응을 했다. 하긴 그동안 우린 공식적으로 도장만 안 찍었을 뿐 거의 연인처럼 지내오지 않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수남이가 정식적으로 고백을 해 오면 좋겠다. 그럼 차갑게 거절해야지. 수남이가 당황하는 것을 확인한 후에 한바탕 크게 웃고 마지못해 수락한 척해야지. 수남이가 당황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귀여우니까.     


 결국 약속 시간보다 훨씬 먼저 카페에 도착하고 말았다. 여성의 품위를 위해서라면 약간 늦게 가는 센스도 필요한데, 몸이 재촉해 대는 걸 막을 수 있는 도리는 없었다. 직원에게는 일행이 도착하면 음료를 시키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가방에 챙겨 온 수첩을 꺼냈다. 나의 비밀 노트가 오늘은 소원 노트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 글자 한 글자에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꾹꾹 눌러 담았다.     


‘그보다 먼저 카페에 도착해서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그가 고백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칫국부터 마신 것일 수도 있지만, 그가 고백한다면 그 고백을 받아주고 싶습니다. 제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상처와 분노와 절망의 마음들이 그를 통해 회복...’     


 한창 써 내려가고 있었는데 수남이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버리는 바람에 수첩을 급하게 접어 가방에 다시 넣었다. 그는 손에 뭔가를 달랑달랑 들고 오더니 무심하게 툭, 하고 건넨다. 식용유 세트였다. 불타는 내 마음에 기름이라도 붓겠다는 거야?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조금 엉뚱한 면이 있어도 나에겐 엉뚱하게도 위로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다. 난 왜 이 아이에게 이토록 끌리는 거지? 식용유 세트 안에는 고백의 편지도 담겨 있단다. 커밍아웃하려는 거냐는 농담을 건넸지만 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아이는 정식으로 나에게 사귀자는 고백을 하려는 것이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평소처럼 농담을 주고받고 우린 헤어졌다. 버스 유리창에 성에를 만들어 변수남 바보,라고 장난을 치니 수남이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멀어지는 수남이를 뒤로 둔 채 난 버스가 얼른 집에 도착하길 염원했다.     


 여자의 직감은 정말 소름 돋을 정도로 무섭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내 예상대로 수남이는 나를 좋아하고 있었고 정식으로 사귀자는 고백을 편지에 담았다. 수남이다운 부끄러운 고백이었다. 자기 마음을 받아준다면 명절의 마지막 날인 9월 26일 저녁 7시까지 미르연못으로 나오라고 한다. 나도 모르게 피식, 하는 옅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냥 아까 만났던 카페에서 당당하게 고백해도 되는데, 식용유 선물 세트에다가 이런 부끄러운 고백의 편지를 넣었을 어리숙하고 순진무구한 수남이의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와 버린 것이다. 내 대답은 물론 YES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고 싶지만 편지에는 전화나 메시지도 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감정을 미르연못에 그대로 가져가고 싶다나 뭐라나. 이렇게 순수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순수한 아이가 나에게 닿으려고 하고 있다. 나도 너에게 닿고 싶어. 수남아. 우린 닿을 수 있겠지?     


 드디어 대망의 D-day가 찾아왔다. 바로 정선주와 변수남 커플의 역사적인 1일이 될 수도 있는 가슴 벅차오르는 날. 지난밤엔 가슴설렘병을 앓아서 거의 한숨도 못 잔 거 같다. 모든 신경세포와 근육이 이완되면서 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 하루 종일 내 육체를 조종하고 지배했다. 시간아, 어서 가버려라. 오로지 나의 초점은 ‘저녁 7시’, ‘미르연못’, 그리고 ‘변수남’으로 향했다. 미르연못까지는 버스로 대략 1시간 거리이기 때문에 5시 30분쯤 출발하면 여유롭게 도착할 것 같았지만, 이런 역사적인 날에는 좀 더 수남이를 골려주고 싶었다. 오늘은 수남이 골탕 좀 먹여줄까? 7시 훌쩍 지나서 도착하면 아마 수남이의 영혼은 탈탈 털려있겠지? 깜짝 지각 이벤트를 할 생각에 벌써부터 짜릿한 감각이 기분 좋게 몰려왔다. 변수남, 어디 한 번 애타게 기다려보라지. 누나는 느긋하게 출발해서 짠, 하고 마법처럼 등장해 줄게. 너가 나한테 마법을 걸었듯이.  


 6시를 훌쩍 넘기고 나서 집에서 출발했다. 버스 정거장까지는 단 5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학교 후문을 경유하는 버스가 막 도착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버스가 조금은 얄미웠지만, 행복한 마음을 한가득 안고 버스에 올랐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서 흘러가는 도시의 풍경을 두 눈에 담았다. 오늘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저 아름답고 황홀해 보였다. 인도 위의 가로수들, 강아지와 산책을 즐기는 중년의 아주머니, 빨간 우체통과 공중전화 부스, 조금씩 흩날리는 빗줄기,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나와 수남이의 설레는 첫출발을 미리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주었다. 목적지인 대학교 후문 쪽을 향해 한 정거장, 두 정거장 지날 때마다 수남이와 난 가까워졌고, 심장 박동은 정거장을 지나칠수록 더욱 빠르게 뛰었다. 몇 정거장쯤 지났을까. 버스가 멈춰 선 뒤 승차하는 입구 쪽에서 한 무리의 승차객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느라고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쓸 틈도 없었다. 그때였다.     


“혹시, 정선주?”     


 내 자리 옆에서 버스 손잡이를 쥐고 우뚝 서 있는 한 남자. 내 이름을 알고 있는 한 남자. 과거 날 망가뜨린 한 남자. 바로 그 인간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설레던 마음의 불씨들이 모조리 사그라들었다. 내 의지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손발이 심하게 떨려왔다. 그 인간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버스는 무심히도 도시의 도로 위를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사실 온몸이 경직되어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인간은 재밌는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표정으로 군중 속의 섞여 있는 맹수가 되어 언제든 나를 물어뜯을 수 있다는 각오를 품은 듯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아니지, 아니지. 우리 얼마 전에 봤었잖아. 그렇지? 내 카페에서.”   

  

 그 인간은 카페에서 내가 도망쳤던 걸 알고 있었다. 그날 눈이 마주치진 않아서 모를 줄 알았는데 내 이름을 다급하게 외치며 따라나선 여자 동기들로 인해 내 정체가 그 인간에게 노출되었나 보다. 이젠 공포감마저 엄습해 온다. 그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수의 실로 내 온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난 꼼짝달싹 못하고 마수의 실에 묶인 채로 그저 할 수 있는 건 공황장애라도 온 것처럼 거친 호흡만 헉헉 내쉴 뿐이었다.     

 

“그나저나, 선주야. 우리 그날 있었던 일, 오빠가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걸 또 쪼르르 부모님께 말하는 바람에 공개적으로 재판정에도 서보고 전과 기록도 하나 더 생기고. 인생 재밌어. 그렇지?”     


 그 인간은 점점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만 없으면 언제든 나를 갈기갈기 물어뜯어 놓을 것 같았다.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어쩐다. 아직 학교 후문까지는 몇 정거장 더 가야 하는데. 그 인간이 날 따라서 내릴까? 그러면 더욱 안 되는데. 수남이가 그 인간을 보면 안 되는데. 그 인간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줄 알았는데 왜 내 인생을 지독하게 쫓아다니는 걸까. 결단이 필요했다. 섣부른 추측일 수 있겠지만 그 인간도 자신의 카페를 가기 위해서라면 학교 후문 근방에 하차할 게 분명하다. 타이밍을 보았다가 버스가 멈춰서는 순간 탈출해야 한다. 정차와 동시에 삐, 하는 신호음과 동시에 하차문이 열리자 나는 있는 힘껏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막 하차를 하려는 승객들 틈 속에 파묻혀 버스 밖으로 탈출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학교 후문 쪽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신은 야속하게도 아직 나에게 내릴 벌이 남아 있나 보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그 인간이 다시 나타난 걸까. 정말 난 누구를 사랑할 권리도, 누구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걸까. 그래도 독실한 부모님 밑에서 남들에게 피해 안 끼치면서 선하게 살아온 것 같은데. 비록 나에게 죄가 있다면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던 철없는 나이에 겁 없이 누군가를 좋아했던 것밖에 없는데. 이것도 죄가 되나. 만약 이것이 죄라면 신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 혹시 신이 나를 프로메테우스라고 착각한 게 아닐까. 그 인간이라는 집행의 대리자를 통해 그렇게 내 심장을 파먹어 놓고도 아직도 파먹을 심장이 남아 있기나 하나. 수남이를 만나서 점차 재생돼 가고 있는 내 심장을 정녕 신은 허락하지 않으시려는 걸까.      


 한참을 뛰어가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그만 △△사거리 근방에서 멈춰 섰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7시가 되기 5분 전이었다. 이러면 수남이가 많이 기다릴 텐데. 택시라도 잡을 요량으로 길가에 우뚝 서서 뒤를 돌아보니 집행의 대리자는 악마의 미소를 머금고 나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오고 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내가 버스에서 내릴 때 따라서 내렸구나. 지독한 인간, 날 얼마나 더 짓밟으려고. 소리라도 질러야 하나, 주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요청을 해야 하나,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내 머릿속이 헝클어지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나에게 닿았다.     


“정선주? 여기서 뭐 하냐? 야, 근데 무슨 땀을 그리?”     


 수남이의 친구 문순정이었다. 편한 외출복 차림을 한 그는 뭐가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구겨진 검은색 봉지를 덜렁덜렁 들고 있었다. 나에게 다가서던 그 인간은 코앞에서 먹잇감을 놓친 듯 분한 표정을 지은 채 내 쪽 상황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순정이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내 모습, 창백한 기색을 하고 있는 내 모습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듯했다. 그는 나에게 가깝게 다가오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진심으로 날 걱정해 주었지만 난 순정이의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순정이가, 그리고 순정이를 통해 수남이가 알게 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그 인간 사이의 악연의 연결고리는 어떤 식으로든 끊어내야만 했다. 순정이는 내 입에서 어느 말도 나오지 않자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반경 10미터 이내의 모든 거리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설마, 뒤에 있는 저 남자 때문이야?”     


 눈물을 글썽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말았다. 순정이는 알았다는 표정으로 갑자기 내 손을 꽉 부둥켜 잡았다. 당황할 것도 없이 지금은 순정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내가 같이 있어 줄게. 아니, 목적지까지 같이 가 줄게. 어디 가는 중이야?”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학교생활을 하는, 그저 수남이라는 순수한 아이를 자기 쪽 세계로 꼬드기는 가볍고 음흉한 아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오늘 순정이는 그동안의 편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다. 사실 순정이에 대해 들려오는 소문도 여자를 잘 꼬신다, 여자와 잠자리를 좋아한다 등 그리 건전한 내용은 아니었기에 난 순정이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내재하고 있었다. 순정이가 내 손을 잡은 것은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속히 그 인간에게서 멀어지는 게 급선무였다. 순정이는 목적지를 몰랐지만 날 조금씩 리드하면서 학교 쪽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갔다. 그 인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상상하기도 싫었다. 어서 빨리 벗어나는 게 최선의 해결 방안이었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어느새 그 인간이 우릴 앞지르더니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순정이와 함께 하던 몇 걸음의 행군은 얼마 안 가서 끝나고 말았다. 그 인간은 나와 순정이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나에게 한 차례 경멸의 눈빛을 던진 후 순정이에게 판도라의 상자를 선물하고 말았다.  

         

“혹시 얘 남자 친구? 크크크. 얘가 더러운 년이라는 건 알고 만나? 얘 처녀 아니야. 그러니까 만나는 거 다시 한번 생각해 봐.”     


 그 인간이 건넨 판도라의 상자를 받은 순정이는 충격적인 말이라도 들은 듯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어버렸고, 그 인간은 머가 그리 신났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학교 쪽을 향해 유유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순정이가 그 인간을 붙잡으려고 나서려고 한 순간, 나는 잡고 있던 순정이의 손을 더욱 강하게 붙잡으며 순정이를 멈춰 세웠다. 뛰어가려다가 붙잡힌 순정이의 반동을 견디지 못한 검은색 봉지는 그 안에 있던 물체를 그만 토해내고 말았다. 땅에 떨어져 있는 건 검은색 번개탄이었다. 순정이는 당황한 듯 길바닥에 떨어진 번개탄을 다시 주워 들어 봉지 안에 황급히 감추고 황당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말을 건넸다.   

   

“저 인간 도대체 뭐야? 스토커야? 무슨 저딴 말을 하고 도망쳐? 이 손 놔봐. 저 인간 잡아놓고 따져야겠어.”       

 난 순정이의 손을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이젠 놀고 있던 왼손마저 순정이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 난 양팔로 순정이를 잡고 하소연하듯 부탁했다.   

  

“순정아, 그러지 마. 그냥 가게 놔둬. 부탁이야.”     

“그래도 그렇지. 기다려봐. 내가 가서…….”     

“순정아, 부탁이야…….”     


 순정이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절망하는 눈빛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나에게 어떤 말도 건넬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건네면 안 된다는 것을.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순정이의 친절한 호의를 뿌리쳤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아까 그 인간이 열어버린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튀어나온 저주의 워드들만이 맴돌 분이었다.     


‘더러운 년, 더러운 년, 더러운 년, 더러운 년,’     


 난 더러운 년이다. 깨끗해졌을 줄로 알았는데 그건 나만의 비겁한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깨끗한 수남이에겐 깨끗한 여자가 어울리는 게 맞다. 수남이를 향한 나의 애틋한 마음은 결국 나만의 욕심이었고 등가(等價)인 줄로만 알았던 나와 수남이의 사랑의 감정은 애초에 거래가 성립할 수 없는, 계산부터가 잘못된 부등가(不等價)의 감정이었다. 그토록 너에게 닿고 싶었는데 우린 결국 닿을 수 없는 인연이구나. 미안해. 수남아. 너에게 닿긴 힘들 것 같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순정이를 뒤로 하고 난 수남이와의 약속 장소가 아닌, 우리 집 쪽을 향해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까부터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의 속도가 더욱 붙기 시작했다. 버스를 탈 생각도 하지 않고 비를 맞겠다고 나선 미친년처럼 비에 홀딱 젖어 가며 걷고 또 걸었다. 비가 억수로 지면을 때리기 시작해도, 내 몸을 모두 비로 적셔도 내 과거는 절대 씻겨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난 수남이의 고백을 받아 줄 수 없다. 비가 더 쏟아졌으면 좋겠다.     


 다음 날 순정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차마 순정이의 빈소를 찾아갈 수가 없었다. 내 어두운 과거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단 한 친구.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순정이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빈소에 있을 수남이도. 순정이의 장례를 마치고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어쩔 수 없이 수남이와 난 마주칠 수밖에 없었지만, 서로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깨끗한 수남이는 더러운 날 피해 다니느라 바빴다. 우연히 시선이 마주칠 때도 수남이가 먼저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깨끗한 고백을 받아주지 않은 나는 더러운 사람이니까. 순정이와 나를 떠나보낸 수남이는 무척 외로워 보였다. 삶의 모든 활기를 어딘가에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난 위선의 가면을 쓰고 과거를 감춘 채 여자 동기들과 활기차게 학교생활을 해 나갔다. 예전에 비해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젠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술을 마시며 어울리니 관계의 스펙트럼은 점점 넓어졌다. 수남이는 유일했던 관계의 스펙트럼이 모두 부서진 채 한 줄기 빛도 내리지 않는 어둠의 구렁텅이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홀로 독방에 들어가 도무지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수남이는 군대를 가버렸다. 입대 며칠 전에 몸 건강히 잘 다녀오라고 문자 메시지를 썼지만 끝내 발송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이제 수남이를 2년 2개월 동안 볼 수 없다. 가끔 학교에서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래도 나와 같은 하늘 아래 수남이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신은 허락하지 않았다. 큰 상처가 터진 후 잘 아물고 있었는데 그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난 것만 같았다. 상처에 소독약을 뿌려주고, 호, 입바람을 불어주며, 붕대를 감아주던 그 아이는 이제 내 곁에 없다. 하지만 수남아. 군대에서 다치지 말고 건강해야 돼? 네가 없는 동안에 내 상처는 시간의 바람이 조금씩 말려주겠지. 언제 회복될진 모르겠지만 나도 노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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