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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May 22. 2024

<그녀라는 1인칭> 2화

지난 과거를 토해버리고 싶어.

 변수남, 이름은 정말 촌스럽기 그지없는데 뭔가 독특하고 야릇한 부분이 있다. 멀쩡하게 생겼는데 학과 생활에 잘 적응을 못 하는 것 같고 동기들과 식사 자리에도 못 끼는 등 태양계의 어느 이름 모를 행성처럼 주변을 겉도는 느낌이다. 시답잖은 이야기만 올라오던 학과 방명록에 어느 순간부터 꽤 근사한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진위를 캘 것도 없이 변수남이라는 동기가 쓴 글들임이 꼬리글들을 통해 밝혀졌다. 문학적 감수성이 보통이 아닌 아이였다. 무엇보다 수남이가 쓴 글의 주제는 대부분 사랑에 대한 것들이었다. 일종의 사랑에 대한 사색이자 통찰이었는데 사랑을 많이 했음에서 오는 깨달음이거나, 사랑을 안 해봤지만 고결한 사랑을 꿈꾸는 사랑의 젬병 둘 중의 하나인 것 같았다. 만약 수남이가 고결한 사랑을 꿈꾸는 사랑의 젬병이라면 이 아이가 그리는 사랑의 세계는 너무 낭만적이다 못해 신성해 보였다. 사랑도 안 해 본 고작 스무 살짜리가 그리는 사랑의 스케치는 습작 수준이긴 해도 빛나는 완성작이었다. 나도 사랑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난 오로지 겉으로 내비치는 모습을 사랑이라 착각한 죄로 신의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니까.     


 어느 날 교양 수업을 마치고 학과실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등나무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수남이를 발견했다. 혼자 무슨 궁상을 떨고 있을까, 싶기도 하고 뭔가 자신만의 상념에 잠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도통 어떤 생각을 하며 학교생활을 해 나가는지 종잡을 수가 없는 친구다. 수남이가 자리를 떠나기 전에 근처에 있는 인문대학교 1층 자판기에서 서둘러 캔 커피를 뽑았다. 가방 속에 있던 포스트잇을 꺼내서 간단한 메모를 작성한 뒤 캔 커피에 붙이고 조심스레 수남이에게 다가갔다. 수남이와 몇 마디 말을 나누다 보니 조금 엉뚱한 면이 있는 아이였다. 상대와 대화조차 못 할 줄 알았는데 은근히 위트 넘치게 말도 잘한다. 단지 사회성이 약간 결여되었을 뿐, 수남이의 내면은 맑고 순수한 영혼으로 꽉 차 있었다. 꼬리를 물고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수남이는 작가가 꿈이란다. 학과 방명록에 써놓은 글들이 범상치 않다고 여겼었는데 역시 문학적 센스가 탁월한 아이였다. 언젠가 훌륭한 작가가 될 게 분명하다.   

   

 마침 점심시간이 가까워져서 수남이에게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권유하려던 찰나에, 사범대 2호관에서 여자 동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녀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체포하듯이 날 붙잡는 바람에 수남이에게 말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래도 아쉬운 맘에 함께 가자는 말을 꺼내 보았지만 수남이는 남자 동기들이랑 약속이 있다며 내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평소에 순정이라는 남자 동기와 단둘이 밥 먹는 장면은 몇 번 목격했지만, 다른 남자 동기들이랑 밥 먹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나나 여자 동기들이 어색해서 남자 동기 핑계 대며 둘러댔겠지. 여자 동기들과 돈가스를 먹으러 가기 전에 아까 사놓은 캔 커피를 수남이에게 무심하게 건넸다. 비록 카페에서 파는 비싼 카푸치노 커피는 아니었지만, 수남이가 쓴 ‘카푸치노에 대한 단상’이란 글에 대한 나름의 작은 보답이자 팬심이었다.     


 며칠이 흘러 내가 먼저 수남이에게 돈가스를 먹자고 제안했다. 수남이에 대한 호감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수남이란 아이는 이상하게 나의 호기심을 계속 자극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수남이 자체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수남이가 남긴 글들이 향기로운 꽃처럼 날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남긴 글들은 내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주는 것 같았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이 아이는 어떻게 그 나이에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깊게 통찰하고 있는 거지? 가벼운 만남과 헤어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통속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아이가 나타날 수 있는 거지? 수남이는 가벼운 사랑놀음이 유행처럼 관통하고 있는 시대에 출몰한 돌연변이 같았다.      


 수남이는 돈가스를 싫어하나 보다. 그저 의미 없는 칼질만 반복하고 기껏 입 안에 넣은 돈가스 조각도 깨작깨작 맛없게 씹고만 있다. 나의 잔소리 같은 질책에 돈가스를 좋아한다고 서툴게 변명은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복스럽게 먹어야 복이 오지. 식사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수남이가 웬일로 먼저 말을 걸었다. 남자 친구가 있냐는 말엔 농담처럼 반응을 해줬지만, 애인 있냐는 말엔 나도 모르게 정색을 하고 말았다. 수남이가 죄인처럼 당황하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 수남아.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죄인이라서 그래.      


 교회 수련회 사건 이후로 난 다신 사랑 따위의 감정은 내 삶에 심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에서 오는 처절한 배신감, 더러운 존재에 의해 더럽혀진 내 몸과 영혼. 난 더러운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있는 더러운 여자였다. 나에겐 사랑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그래서 사랑이란 감정을 과감히 버리고 좀 더 사람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롭게 어울리며 내 과거를 어떻게든 씻어내고 싶었다. 사람한테 받은 사랑의 상처를 또 다른 사람으로 치료하고 싶었다. 여러 사람과 거침없이, 유쾌하게 어울리며 내 더러운 과거를 하나씩 지워나가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내 주변에 꽤 여러 사람이, 좋은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함께 웃고 떠들고, 같이 밥 먹고, 어울려 공부하며 하루하루를 사람들과 가벼운 즐거움으로 채워나갔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았다. 단 수남이의 글을 보기 전까진.     


 수남이가 쓴 글은 어둡고 차가운 나의 과거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힘내라고, 용기 내라고 격려해 주었고 너도 충분히 사랑을 누릴 자격이 있다며 위로해 주었다. 고작 글일 뿐인데 엎어진 내 삶이 다시 일으켜진 기분이었다. 변수남, 넌 도대체 누구니?       


 시험 기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뭐 평소에 워낙 수업도 충실히 들었고, 복습도 철저히 해 놓은 편이라 큰 걱정이 되진 않았다. 여자 동기들과 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기분 전환 차 들렸던 카페에서 마침내 일이 터지고 말았다. 여자 동기 한 명이 학교 정문 근처에 새로 개업한 카페가 있는데, 거기 사장님이 꽤 훈남이라며 우리를 달콤하게 유인했다. 여자 동기들은 사장님이 훈남이라는 말에 열광하며 카페를 향해 가슴 설레고 경쾌한 진군을 시작했다. 카페에 가까워지자 동기들은 카페 사장님의 준수한 외모를 저마다 머릿속에 그리며 카페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절대 마주쳐서는 안 될 인간을 마주치고 말았다.     


‘덜컹’     

     

 심장이 무너지고 말았다. 왜 저 인간이 여기 있는 거지?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그 인간이 버젓하게 원두를 내리고 있다. 아직 날 발견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카페문을 박차고 밖으로 황급히 뛰쳐나갔다. 여자 동기들이 내 이름을 다급하게 외치며 내 뒤를 따라왔다. 숨이 차오더라도 최대한 멀리, 온 속력을 다해서 카페 반대편을 향해, 학교 쪽을 향해 뛰어갔다.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자, 근처에 있던 플라타너스를 한 손으로 짚은 채 거친 호흡을 헉헉 내뱉었다. 잠시 후 따라오던 여자 동기들도 힘겨운 숨을 내쉬며 내 곁에 모여들 섰다.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들이다. 그 인간을 보자마자 요동치던 심장은 뜀박질로 인해 더욱 요란하게 박동했다.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 동기들은 내 호흡이 안정될 때까지 차분히 내 곁을 지켜주었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한 여자 동기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선주야, 무슨 일이야?”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는 없었다. 깨끗하게 빡빡 씻고 싶은 얼룩진 과거를 굳이 얘네들이 알 필요까진 없었다. 알아서는 안 되는 과거이고, 간절히 지우고 싶은 과거였다.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새살이 돋아나고 있던, 아물어 가고 있던 마음의 상처를 누군가가 또다시 할퀴는 바람에 상처에서 고약한 진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떤 변명이라도 해서 어색한 상황이 들이닥치기 전에 이들이 품고 있는 의문점을 해소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싸한 변명이 급작스럽게 생각나진 않았다. 결국엔 뽑아서는 안 될 비장의 카드를 쓰는 것밖엔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하나님, 죄송해요. 오늘만 봐주세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무장하여 비장의 카드를 꺼내고 말았다.     


“오늘 다들 시간 어때? 술 한 잔 할래?”     


 다들 적잖이 놀라는 눈치다. 내 입에서 술 먹자는 말이 나올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알코올쓰레기가 알코올을 먹자고 하니 여자 동기들은 내게 큰일이라도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고 오늘의 시험공부는 과감히 접기로 했다. 우린 그렇게 도서관에 펼쳐 놓았던 책들을 대충 챙겨 나와서 학교 후문 쪽 호프집으로 향했다. 조용하고 진지한 대화가 오갈 수 없을 정도의 시끄러운 호프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의도한 것이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선 난 동기들에게 피의자처럼 오늘의 사건에 대해서 심문받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생전 처음 마셔보는 술이었지만 겁 없이 무작정 들이부었다. 동기들은 이런 내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무슨 일이냐며 계속 대화를 시도했지만, 난 대답 대신 맥주잔을 들었다. 쓰디쓴 맛이었지만 지금의 내 기분을 풀어주기엔 딱 알맞은 맛이었다.      


“야, 정선주 무슨 일이야? 응? 사람 걱정은 있는 대로 끼쳐놓고. 말 좀 해봐.”     

“이야, 이게 맥주 맛이야? 기막히군.”     

“말만 빙빙 돌리지 말고, 응? 아까 카페에선 왜 갑자기 그리 뛰쳐나간 건데?”     

“난 왜 진작에 이런 맛을 몰라봤을까? 나 알코올 체질인가 봐. 이제야 뒤늦게 적성을 발견했네.”     

“너, 진짜.”     

“그냥 마시자. 사실 커피보단 맥주가 너무 먹고 싶어서 뛰쳐나간 거야. 오늘은 그냥 마시고 죽자.”      


 얼마나 들이부은 걸까?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구토기가 몰려왔다. 참다가 참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와 화장실로 돌진하여 애먼 변기를 부여잡고 소화기관에 존재하는 모든 액체와 고체를 힘들게 토해냈다. 신맛이 올라오며 온몸의 기운이 싹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동기 하나가 뒤늦게 따라와 한심스런 한숨을 쉬며 내 등을 토닥여줬다. 내 지난 더러운 과거도 구토와 함께 모두 쏟아져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등을 토닥여주는 사람은 여자 동기인데 왠지 수남이가 내 등뒤에 서서 토닥여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 지난 과거를 모두 토해버리라고, 내 삶을 토닥여주는 건 수남이가 아닐까? 힘없이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난 테이블 위에 그대로 얼굴을 파묻었다. 일어나 보니 다음 날 아침이었고 집이었다. 어떻게 집까지 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변수남, 참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카페에서 그 인간을 본 이후로 내 삶은 꼭 누가 죽이러 오는 것 같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 인간을 다시 마주칠까 봐 늘 노심초사하면서 공포감에 영혼이 팔린 채 학교 생활을 해 나갔다. 그러던 중 수남이한테서 기괴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돈가ㅅ’라고만 적혀 있고 더 이상 추가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뭐 하자는 거지? 지금 누구 놀리는 건가? 자다가 보냈나? 아무튼 ‘돈가ㅅ’는 추측컨대 돈가스라는 말은 확실한데 그럼 돈가스를 같이 먹잔 말인가? 문자를 보냈으면 끝을 맺어야지, 참 이해가 안 되는 녀석이다. 정신 연령이 높은 내가 나서야지 원. 그래도 수남이한테서 먼저 밥 먹자는 말을 들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돈가ㅅ 콜! 예전에 먹었던 그곳, 오늘 12시 40분!’     

  

 사실 감격했다. 수남이가 날 위해 마술까지 직접 준비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리숙한 표정으로 익숙하지 않게 마술을 선보이는데 예기치 않은 감동이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친구 관계도 별로 없고, 늘 혼자 다니거나, 순정이라는 남자 동기하고만 삶을 영위하는 자발적 외톨이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수남이는 내 모든 과거의 비밀을 알고 있기나 한 듯 내 마음을 능숙하게 잘 다뤘다.


 수첩을 꺼냈다. 참고로 이 수첩은 나만의 비밀 노트와 같은 것이다. 학창 시절에 제목도 잘 기억 안 나는 자기 계발서를 우연히 읽다가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면 무슨 일이든 기적같이 일어난다’는 글귀를 보고 감명을 받아 수첩을 구매했다. 처음에는 일차원적으로 학업 성적 향상, 진로 희망, 넉넉한 자산같이 오직 나만의 욕구 충족을 위한 속물 같은 메모를 주로 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나의 은밀한 감정이나, 타인을 위한 메모 등으로 내용이 점차 확장되었다. 수남이 몰래 수첩에다가 나의 감정을 비밀스럽게 끄적거렸다.     


‘어쩌면 너란 존재는 신이 내게 주신 선물이 아닐까. 그만큼 벌 받았으니, 이젠 선물을 줄 차례야, 라고 신이 말하는 것 같아. 고마워 수남아. 나에게 닿아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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