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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Nov 13. 2023

스지의상실

학교 가던 길에 탔던 버스에서 멍하니 창 밖을 보면 별 거 없는 지루하고 흔한 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반년 가까이 임대가 나가지 않던 고깃집 자리. 아파트 건축을 위해 열심히 포크레인이 돌아다니던 공사현장. 역 앞 정류장에선 우르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리고 새로운 무리가 우르르 올라타곤 했다.


작은 내천이 흐르는 길을 따라 버스는 흔들거렸고 무수한 생각들을 흘러보내며 14번 버스와 사 년의 시간이 흘렀다. 내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 전엔 큰 오거리가 있었고 그 곳의 신호대기는 한없이 길어서 이따금 환승해야 하는 버스가 맞은편에서 오는 걸 보면 꼬인 신호 탓에 갈아타야 할 버스를 놓치게 될까 봐 오소소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렇게 창 밖을 바라보다 보면 다리 아래쪽 작은 상가들이 즐비한 곳에 빨간색 페인트 칠이 벗겨져가던 낡은간판 하나가 눈에 띄곤 했었다. 빨간색 나무간판에 흰 글씨체로 ‘스지의상실’이라는 다섯글자가 띄어쓰기 하나 없이 숨 막히게 붙어있었다.


제법 여운 있어 보이는 상호명이라 독립출판서점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쇼윈도에 곧게 뻗은 마네킹들이 저마다 자신이 걸친 액세서리와 옷을 뽐내고 있었다. 네이밍의 의미는 스지의“상실”이 아니라 “스지”의상실이었던 거다.


한 번쯤은 가게 안을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가야하는 방향과는 정 반대였고 그 일대를 걸어본 적도 없기에 어쩌다 보니 그 기억은 십여 년 전 해묵은 일로 남아버렸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대학생이던 나는 취업을 해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연애를 하고 헤어지고 또다시 연애를 하고 결혼 후 아기를 낳은 엄마가 되었다.


계절감을 느끼기도 전에 세월은 바삐 흘렀고 여차하니애매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봄바람이 따뜻한 것 같아 청자켓을 꺼내 입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서 끝내 발을 내딛지 못하고 문을 닫아 집 안에 남은 기분. 도태되는 건 도저히 참기가 어려워 쉼 없이 살아와보니 한 사람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었다.


내가 상실한 것은 무엇이고 내게 남은 것은 또 무엇인가. 오래전 그 의상실 간판을 바라보며 학점과 취업에 연연하기 바빴던 내가 가졌던 꿈은 무엇이고 그때의 내가 바라던 미래의 목표는 퍽 이뤄진 상태인 걸까. 소설을 쓰겠다던 꿈은 어중간한 상태에서 멈춘 채 굳어버렸고 가정을 꾸리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은 예상보다 빠르게 이뤄졌다.


나는 내가 가장 예뻤던, 그러므로 삶의 1순위가 자신이던 그때와 다르게 스스로를 조금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 지금의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보다 소중한 것이 남아있다.


매일같이 하던 화장도, 아침마다 입던 셔츠에 슬랙스 차림의 의상도, 자기만족을 위한 끊임없던 소비와 과시도. 지금의 내겐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생얼로, 편한 트레이닝 복장을 입고내 욕심에 끊임없이 찾아보는 아이의 교육과 발달상황이 지금의 내겐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내가 상실한 것은 나의 청춘, 나의 경력, 나의 꿈, 나의 체력. 그럼에도 슬프지 않은 건 눈을 맞추면 해사하게 웃어 보이는 아기의 맑은 웃음. 언제나 내 편에 서있는 나의 가족. 오래전 내가 남겨두고 온 사랑은 여전히 남아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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