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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Nov 20. 2023

엄마에게

우리 엄마는 내 브런치 구독자다. 내가 처음 브런치에 글을 올렸던 그때부터 꾸준히 내 글을 읽어주는 나의 구독자.


소설가를 꿈꾸던 중학생 때부터 꾸준히 글이라고 불릴만한 것을 쓰긴 했었지만 그 당시 엄마의 평가는 냉혹했다. 혹평이었는데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듣고 싶던 나이였던지라 지금에 와서 엄마의 코멘트는 생각나지도 않는다. 단지 칭찬받기엔 부족했던 글솜씨였다는것 밖엔.


그러나 점점 내가 머리가 크고, 생각이 풍부해지고, 경험이 많아지면서 녹여내는 이야기가 스스로도 제법 읽을만하다 느낄 무렵부터 엄마는 글의 흐름이 매끄럽고 진심이 느껴진다며 독후감처럼 짧은 소감들을 내어놓았다. 가끔은 민망할 정도로 엄마는 나를 추켜세워 주곤 했다. 나이 들어서도 꾸준히 글을 써보라면서.


그렇기에 브런치에 내가 쓴 에세이들을 읽고 미처 말로다 표현하지 않은 속마음까지 들킬 걸 알면서도 나는 진솔하게 글을 써왔다.


어린 날엔 나의 든든한 보호자로서, 성인이 되어서는 인생의 선배이자 같은 여성으로서의 공감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출산을 경험하고 나서 나는 엄마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너 아기땐 하도 잠을 안 자서 내려놓기만 하면 응애- 울어서 포대기로 업고 집안일했어. 밤에도 어찌나 잠을 안 자던지 아빠랑 차 태우고 한 바퀴 돌면 그제야 잠들었다니까 그러고도 힘든 줄 몰랐어 엄마는, 이라고 하는 엄마의 말은 육아 난이도를 높게 만든 내 어린 날이 업보가 되어 돌아온 건지 생후 50일이 지난 아기를 키우며 육아를 하는 내게 그 당시 얼마나 엄마가 하드코어적인 삶을 보냈는가 실감 났다.


새벽 수유를 하느라 밤에 두세시간에 한 번씩 깨는 건 기본이고, 칭얼대며 보채는 아기를 달래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날짜 감각도 사라져서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날도 있었다. 자유란 무엇인가. 바깥에 나가는 일도 남편 오고 나서야 잠깐뿐. 그마저도 외출하고 싶은 의욕조차 들지 않을 만큼 체력이 떨어져서 아기 목욕시키고 저녁밥을 차리고 나면  금세 하루 끝자락에 다다라있었다.


8년이나 일해왔는데도 엄마가 되기 전의 삶이 전생처럼 아득히 느껴졌고 피로감과 관절 통증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를 보며 웃는 아기의 미소 한 번에 비타민 가득한 영양제라도 섭취한 것처럼 피로감은 사르르 사라져 버렸다.


출산 후 내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엄마였음을 엄마는 알고 있을까. 아기의 상태를 확인한 후 나는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엄마가 보고 싶다고 했고 남편은 엄마에게 전화를 건 후 수화기를 내 귀에 대어주었다. 아기의 안녕과 고생했다며 쓰다듬어주던 남편의 손길 그리고 엄마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삼십일 년 전에 이렇게 힘들게 나를 낳았을 엄마가 너무나도 고맙고 안쓰러웠다.


엄마는 내가 당신의 전부라는 이유만으로 나와 동생을 애지중지 키워왔다. 사랑으로 가득 채워서 나를 이만큼키워준 우리 엄마. 퇴근 후 저녁 그리고 주말에만 시간을 함께하는 아빠와 달리 온종일 함께했던 엄마와의 따스한 기억이 더 많아서일까. 누군가 내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엄마라고 대답할 수 있다.


나의 엄마. 사랑스러운 사람. 다정한 사람.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엔 한없이 부족해서 미안한 사람. 여전한 나의 보호자. 든든한 울타리. 그런 엄마도 외할머니 앞에선 어린 딸이었다. 부모님이 모시고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약 일 년 반을 함께 살았던 외할머니는 여태까지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우신 분이었다.


그야말로 우문현답을 내주시던 분. 밭일을 많이 해서 허리가 굽어있었지만 소싯적 키는 170이 넘으셨었고 입이 무겁고 귀가 트여있기에 말수는 적으셨고 언제나 거실 소파 한편에 앉아 주로 엄마나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계시곤 했다. 뼈 위에 살갗만 붙어있다 싶을 정도로 뼈대가 다 드러나는 왜소한 체격이셨는데도 외유내강 그 자체였다.


나의 고민거리는 엄마나 외할머니를 통해 해답을 찾을 수 있었고 엄마의 고민은 나나 외할머니가 답을 내주었다. 지금도 이따금 고민거리가 생길 때면 외할머니가 떠오르곤 한다. 당신이 내 고민해결을 명쾌히 내주실 것만 같았다.


그런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엄마이기에 외유내강인 것도 닮아있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등록금이 부담될까 대학교 진학을 포기할까,라는 생각까지 하던 시기에도 엄마는 내색하지 않으며 불안해하던 우리를 달래곤 했었고 한창 공황과 우울증 그리고 불면증까지 겪으며 건강이 좋지 못해 밤마다 공황발작을 하며 공포감에비명을 질러대던 나를 진정할 때까지 꽈악 끌어안으며 등을 두드리고 괜찮다고 끊임없이 되뇌어주며 현실로 나를 데려오려 애썼다.


정신건강의학과에 상담을 하며 몇 년이나 약을 복용하던 딸을 보며 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울감에 잠식되어 숨쉬기조차 버거울 때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가 미안해할 일이 전혀 아니었음에도.


모성애를 가진 여자는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나도 그렇게 외유내강형으로 바뀔 수 있을까.


나는 내가 평생 우울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살 줄 알았는데 참 신기한 일이다. 언제나 내 한쪽 구석은 곪아있어서 온전치 못하다 여겼는데 나 역시 아기가 생긴 걸 안 그날부터 지금까지 마음의 한 구석이 단단해진 기분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육아를 하면서 엄마가 처음이기에 아기에게 한없이 미안한 순간들도 많다.


아기가 황달로 대학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해야 했을 때 나는 차라리 제왕수술을 했던 통증을 내가 다시 겪었으면 싶었다. 생에 다시 겪고 싶지 않던 그 출산의 고통으로 입원실에 있는 내내 울었으면서도 할 수 만 있다면 내가 아파 아기가 건강해질 수 있기를 바랐다. 당신도 이랬을까.


엄마, 결혼하고도 매일 아침 엄마한테 전화를 걸며 수다를 떠는 게 요즘 나의 낙 중 하나라는 걸 엄마는 알까. 나는 식물에게 정성껏 물을 뿌려주듯이 엄마의 애정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났어. 그리고 그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아기를 낳은 걸 지도 몰라. 세월이 더 흐르면 외할머니의 보호자가 엄마가 되었듯이 엄마의 보호자는 내가 되겠지. 그럼에도 엄마, 나는 서른이 되어서까지 엄마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살았어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된 게 아닌 거 같아. 여전히 불안하고 버티기 힘들기도 하고 맹숭맹숭하게 살고 있거든.


그래서인지 언젠가 엄마의 고향에 가서 엄마랑 시장을 보러 읍내 곳곳을 돌아다니는 내내 다른 곳과 달리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애가 된 거 같았어. 서울에 놀러가거나 다른 곳에 갈 때는 나만 따라와- 하며 앞장섰던 내가 엄마의 동네에선 그냥 엄마의 어린 아기로 남고 싶었지.


그러니 엄마는 계속 어른이 되어줘요. 나를 이끌어주는 어른으로. 그러면 나는 이제 엄마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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