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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Apr 01. 2024

호우주의보

여름께가 되면- 더 정확히는 우기가 계속되는 장마철에는 날씨가 종일 습하고 하늘은 어둑어둑한 것이 사람을축 처지게 만들곤 했다.


영원토록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굵은 빗줄기가 세차게 땅을 때렸고 날아오는 수억가닥의 화살을 막듯 작은 우산 하나로 머리맡을 보호하며 걸어가는 일은 짐짓 고생스러웠는데 그 작은 보호막 하나도 빼앗아갈 만큼 커다란 바람결을 불러오기도 했다.


다리는 온통 바닥에 깔린 물웅덩이에 추적해졌고 양말은 발가락 앞쪽이 푹 젖어 질척해졌다 땅이 나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그런 우중충한 날씨도 결국 여름이었다. 볕이 모든 걸 다 태워버릴 만큼 눈부시게 뜨겁고 주위의 녹음은 청량하고 푸르고 매미가 맴맴 울어대고 청춘이라 생각되는 그 여름뿐만 아니라 이런 것도 여름이었다


목덜미에서, 겨드랑이에서, 가슴팍에서 뜨거운 땀방울이 녹아내렸고 촛농이 타들어가며 녹는 초의 기분은 이런 걸까 싶은 공상도 들었다. 기운을 빼앗긴 탓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선풍기의 바람도 눅눅하고 더워서 그마저 소용이 없었다. 기술의 발달이 이토록 고마울 줄이야. 에어컨 아래에서 제법 산뜻하고보송해진 상태가 되면 눈을 감고 겨울을 떠올리곤 했다.

냉기 가득한 칼바람에 꽁꽁 온몸을 감싸려 롱 코트를 걸치고 보드라운 머플러를 두르고 손끝의 시린 기운을 막으려 니트 장갑을 끼어 둔해진 감각으로 소복이 쌓인 눈길을 뽀도독뽀도독 걸어가며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하고 즐거워하는 연말의 기분을.


어느 쪽도 모두 모순이었다. 지금은 느낄 수 없는 기분을 막상 그 순간엔  왜이리도 그리워지는 건지. 여름엔 겨울을 그리워하고, 겨울엔 봄을 그리워하고. 봄도 이젠 없어질 것처럼 봄의 비읍이 다 써지기도 전에 여름이 되니 퍽 퍽퍽한 계절감이다. 파삭하니 재미가 없달까. 꽃구경을 수영을 단풍구경을 눈사람 만들기를 할 수 없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그럼에도 그게 꼭 아니더라도 이 호우주의보는 언제든지 그리워할 것이 생길 때마다 돌아올 것이다. 애잔하게지나간 무언가를 상념 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핑곗거리다. 그렇기에 그 시기엔 비도 오고 그래서를 자꾸만 듣게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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