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의 모습에 불현듯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집안 사정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내게 어느날 갑자기 말을 걸어왔던 반장. 그다지 예쁘지도 않았고 전교권을 다툴 만큼 똑똑하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친구들이 많이 따르던 아이. 나의 첫사랑이었던 이 영.
그 당시 나의 아버지는 일용직으로 어머니는 반찬가게에서 일을 하며 빚을 갚고 계셨다. 동생은 개천에서 난 용처럼 성적이 좋아 법학과를 목표로 정해놓고 공부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어중간한 성적표를 보며 목표도 꿈도 덮어둔 채 단지 빚을 갚아 동생의 앞날에 보탬이 되어주고 부모님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눠져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면 현관 앞엔 아버지의 구두가 놓여있었다. 정작 아버지가 신고 다니는 것은 먼지와 흙투성이인 낡은 안전화였음에도. 회사의 부도로 중소기업의 임원에서 일용직으로 공사판을 전전하며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아버지의 자존심을 지켜드리기 위해서였을까. 어머니는 매일 밤 아버지의 구두를 윤이 나게 닦아 늘 있어야 할 것처럼 현관 한켠에 두곤하셨다.
어쨌든 그런 가정환경은 남들의 눈엔 어려워 보였던 것 같다. 선생님은 면담 이후 나를 눈에 띄게 신경 쓰셨고 그런 상황에서 반장의 접근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심지어 1학기 때는 사적인 말을 해본 적도 없는 사이였으니 의도가 보이는 친분이 불쾌했다.
갑자기 그 아이가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안녕, 오늘부터 네 짝이 된 이 영이라고 해.”
갑작스레 바뀐 짝꿍에 난색을 표하자 반장은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선생님께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그 눈빛에서 가여워보이는 너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려고,라며 멋대로 해석한 나는 손에 커터칼을 쥐고 있었다는 것도 잊은채로 짜증이 나 팔을 휘둘렀다.
미처 피하지 못한 반장의 이마에 났던 상처. 나를 바라보며 이래도 기억안나냐는 여자가 앞머릿속에 감춰진 흰 이마를 들춰 보이며 미소지었다.
“그날 이후로 너 나한테 되게 잘해줬잖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반장의 앞머리 사이엔 여전히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종의 죄책감으로 반장에게 잘 해주며 친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사는게 바빠 졸업 후엔 떠올릴 틈도 없이 살아왔다. 내가 이 아이를 잊고 있었다니. 무책임한 스스로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비참해졌다.
재잘거리는 반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말없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다 인상을 찌푸렸다. 맛이 써도 너무 썼다. 믹스커피만 마셔봤지 처음 마셔보는 4500원짜리 아메리카노의 맛은 적응할 수가 없었다.
윤수가 가끔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며 사오던 아메리카노. 이걸 처음 마셔보는 나를 반장은 뭐라고 생각하려나. 어쨌든 겨우 4500원에 벌벌 떨며 커피를 사는 나를 보고 얼마나 한심하게 느꼈을까 싶었다. 괜찮냐는 그녀의 걱정에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맛있네,라는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가 생각났다. 어느날 소고기가 먹고 싶다고 투정하던 동생 때문에 퇴근 후 한우를 사오신 아버지. 당신은 딱 한 입만 먹고 입맛이 없다며 방에 들어가시던 그 때가 떠올랐다. 실직하셨던 터라 경제적 사정이 어려웠음에도 아들이 먹고 싶다던 소고기를 사려고 텅 빈 지갑을 뒤져가며 돈을 꺼내셨을 가엾은 나의 아버지.
“무슨 생각해?”
“아, 미안. 갑자기 아버지가..”
"소식 들었어. 미리 알았다면 갔었을텐데... 힘들었겠다."
그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아무도 내게 힘들었겠다며 위로해 주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힘을 내라고만 했었다. 늙은 노모를 부양해야 하고, 집안의 남은 빚을 갚아야만 하고, 미래가 창창한 동생의 앞날을 위해서 첫째인 네가 힘을 내야만 한다고. 그런 내게도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힘들었겠다. 이 말은 4년 전 짝꿍이 되었다며 자리에 앉은 뒤 꺼냈던 말과 비슷했다. 그때도 선생님께 들어서 내 가정사를 알았던 건지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고민 털어놔, 난 반장이니까.라는 뉘앙스의 말을 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내 부끄러운 치부를 들킨 것이 마냥 쪽팔려서 커터칼을 쥔 것도 잊은채 그녀를 향해 팔을 휘둘렀었다. 아. 예나 지금이나 나는 변한 게 없었다.여전히 치부를 감추기에 급급하며 현실에서 도태되어 있는 꼴이.
반장과 짧은 만남 후 조각달이 떠오른 밤. 거리는 암흑으로 물들었지만 곳곳에 켜져 있는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달린 간판들이 화려하게 빛을 발하고있었다. 나는 불빛에 이끌리는 불나방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형, 왜 이렇게 늦었어? 세탁소 다녀온다더니 가서 형이 직접 빨래라도 한 거야?”
언제 집에 돌아온 건지 윤수가 다가왔다. 그제야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넥타이가 떠올랐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넌 잘하고 있지?”
안경을 추켜올리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끄덕이는 윤수를 보니 그래도 적잖이 안심이 됐다. 녀석도 나만큼 부담감을 안고 살아가리라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대로 가장이 되어 집안을 책임져야 하고 녀석은 녀석대로 집안을 일으켜야 하고. 다행히도 새 아르바이트 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와 고깃집 서빙이라니. 둘 다 이미 죽어있는 쉽게 말하면 고깃덩어리인 것에 관한 일이지만 꽤나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후 4시부터 오후 10시까진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했고 오후 11시부터 새벽 4시까진 시체를 닦기 위해 대학 병원 지하로 가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고깃집 아르바이트는 서빙만 하면 되니 손님들 주문을 받고 불판을 갈고 손님들이 간 뒤 뒤처리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직접 고기를 썰어야 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사소한 것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외삼촌의 말처럼 나는 엄마와 동생을 위해 일하고 돈을 벌어야만 했다.
오후 11시 지친 육신을 이끌고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간 곳에는 소주 1 궤짝이 놓여있었다. 자신을 오 씨라고 소개한 남자는 나를 흘깃 보고는 일주일이나 버틸는지 모르겠다,며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는 대뜸 주량이 얼마냐며 물었다. 나와 오씨 아저씨와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