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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Sep 27. 2024

5.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었어-1


 그 곳의 창고는 늘 퀘퀘하고 어두웠으며 누른 곰팡내가 가득해서 잠깐 문을 열어 머리를 넣어보는 일조차 진저리가 쳐지는 곳이었다.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 차있는 그 방엔 없는 게 없었다. 할머니가 결혼할 때 입으셨다던 낡은 한복과 학생 시절 그렸었다던 서예와 그림들 할아버지가 아끼셨던 박제된 꿩 그리고 이사 오기 전 집에서 가져오신 작은 자개장까지 그 안에 다 들어있으니 할머니의 모든 기억이 창고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늘 그 곳을 도깨비 방이라고 불렀다. 어쩐지 서늘하면서도 낡고 지저분한 곳이라 금방이라도 도깨비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칠이 다 벗겨진 연두색의 문 너머엔 잡동사니의 무덤이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녹슨 손잡이를 돌리며 고갤 삐죽 들이밀면 끼이익- 하는 괴기스런 효과음이 덤으로 따라왔고 빛 한 점 없는 방 안의 어둑한 어둠을 뚫고 손으로 벽지를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켜는 순간조차 소름끼치게 싫을 만큼 창고는 내게 공포 그 자체였다. 어쩔 땐 그 잡동사니들의 무덤 안에서 바스락 거리거나, 천장 위에서 다다다-거리며 집안을 활보하는 쥐새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어둠을 싫어했다. 이왕이면 증오하는 편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래전 암흑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 유치원 무렵의 기억인 듯 했다. 어떤 이유로 내가 떼를 쓰며 울어대자 엄마는 무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곤 그대로 장롱 안에 나를 두고 문을 닫았다. 그게 적어도 숨바꼭질이 아닌 것쯤은 엄마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곧 꺼내주겠지,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 장롱은 열리지 않았고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 어둑함에 잠긴 채로 나는 지칠 때까지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 일은 그 무렵에 꽤 자주 있었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겨우 옆으로 몸을 말아 누울 수 있었다. 장롱 문 틈은 너무 좁았고 빛은 희미하게 퍼져나와 밖에 뭐가 있는지 식별할 수 없었다. 아빠가 돌아오기까지 꼬박 몇 시간을 장롱 속에서 갇혀있어야만 했다. 여섯시 무렵, 요술공주가 나오는 만화가 방영하는 시간이 되야 엄마는 나를 꺼내주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가만히 TV를 보고 있으면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으니까. 그 전엔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울다 지쳐 잠들다 깨어나면 여전히 어둠이 나를 감싸고 있었고 나는 또 다시 목이 쉬어라 울어대며 엄마를 부르곤 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일을 아빠에게 말할 수 없었다. 엄마와 나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과도 같았다. 아빠에게 말하는 순간 다시는 엄마를 보지 못할 것 같았으므로. 그럼에도 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오랫동안 이어진 술래 없는 숨바꼭질은 어느 날 일찍 퇴근한 아빠가 장롱에 갇혀 울고 있던 나를 발견하면서 끝이 났다. 뒤늦게 들어온 엄마를 보며 아빠는 처음으로 고함을 지르며 욕을 했었고 그때의 엄마는 목이 터져라 울어대던 나보다 더 크게 울었었다. 어른이 그렇게 서글피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게 내가 사랑하던 엄마라는 사실이, 엄마를 울게 만든 이유가 나란 존재라는게 속상해서 내 울음은 오히려 체한 것 마냥 얹혔다. 더 이상 울기 싫었다.


 그 후로 며칠간은 병원에 있었다. 엄마는 내가 퇴원하는 날에야 잠깐 나타나 나를 껴안고 또 한 번 울었다. 어디가 아팠던건지 엄마는 몸이 많이 부어있었고 내가 좋아하던 엄마의 밝은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가 미안하다며 울던 그때에도 여전히 나의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운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울지 못하게 되었다. 엄마가 내 눈물까지 모조리 앗아가 버린 탓이었다.     


 퇴원 후 아빠는 나를 할머니 댁에 맡겼다.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내가 싫어지면 아빠도 나를 장롱 속에 가둬버릴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어떠한 것도 물을 수 없었다. 그때가 한창 불안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일을 겪었는데 나름대로 방황하지 않고 잘 자라온 스스로가 자랑스러울 만큼. 그때의 나는 충분히 비뚤어진 애정을 받아 언제든 엇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니까.  

   

 그런 나를 붙잡아준 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늘 나를 안아주며 우리 강아지, 라고 부르곤 했다. 자장가도 불러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머리도 묶어주고. 그때도 할머니의 창고는 잡동사니가 가득했었다. 늘 할머니의 선물은 그 창고 안에서 나오곤 했으니까.      


“할머니 말을 안들으면 저기에 가둘꺼예요?”     


할머니는 그런 생각을 하게만든 엄마가 나쁜거라며, 단지 엄마는 조금 아프기 때문에 내가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절대 저기에 가둘 생각이 없으며 저곳에선 나를 위한 선물을 꺼내줄거라고도 했다. 그리고는 생각말고 자라며 동요를 불러주셨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나긋나긋 따스했다. 머리칼을 빗어주며 할머니 무릎에 누워 듣는 자장가. 이대로 영영 이렇게 지내고 싶을 정도로 행복했었다.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었네..."

"할머니 왜 이노래만 불러줘요?"

"할미는 아는 노래가 별로 없어."

"그럼 아빠한테도 이 노래를 들려주었어요?"

".... 그때는 먹고살기 바빠서 아빠한테는 노래불러줄 시간이 없었지."

     

할머니댁에서 지낸 시간이 꽤 오래되었다고 느낄 무렵 고모가 놀러왔다. 선잠에 비몽사몽하던 내 머리맡에서 산후 우울증인지 병원인지 사내아인지 하는 둥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잠결에도 나는 그게 나와 엄마와 그리고 우리 가족의 이야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병약한 동생이 하늘나라로 갔다는 얘길 들었고 어딘가 멀리 떠나있던 엄마와 아빠는 다시 돌아왔다. 엄마는 이번엔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이 화장기없던 얼굴로 이름도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껴안아주었다. 내가 사랑하던 엄마의 다정함이였다. 그럼에도 할머니 품이 더 따스했다고 느껴진건 왜였을까.      


“엄마 내 동생 죽었어?”     


아빠랑 엄마는 놀란 눈치였다. 할머니를 한번 바라보더니 내 얼굴을 보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도 모르는 동생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영원히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눈물이 나왔다. 그날에서야 나는 불안감 없이 엄마 품에 안겨 엉엉 울 수 있었다.

         

 그 이후 열 살이 되도록 불을 키고 자야했다. 불을 끄면 잠을 잘 수 없었다. 그건 할머니댁에서도 마찬가지였었다. 어둠이 싫었고 밤이 무서웠고 장롱은 더더욱 끔찍하게 싫었다. 아빠는 집 안의 옷장들을 모두 없애고 내 방을 옷 방으로 만든 뒤 안방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자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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