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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by 에그 머니 나

엄마의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할머니의 엄마, 쉽게 말하자면 왕 할머니. 우리 집엔 왕 할머니가 계신다. 나이 만큼의 열정과 낭만을 가지신 우리 왕 할머니. 할머니는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홀로 따뜻한 저녁을 만들어 드시고, 허리춤에 만보기를 달고 산책도 다니시고, 담배고 맛있게 피신다. 할머니께는 두 명의 자식과, 다섯명의 손주와, 일곱명의 증 손주가 있다. 그 많은 자손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제 저녁, 엄마에게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집안이 왈칵 뒤집어졌다. 그 누구도 왕 할머니의 생일을 챙기지 않은 채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많다는 자식과 손주들 중 누구도 왕할머니의 생신을 기억하지 못한 것이었다. 엄마는 왕할머니의 생신은 음력으로 계산이 되기 때문에, 매년 생신이 바뀌는 탓에 다들 헷갈린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그렇지,’

음력은 양력보다 11일만큼 빨리 흘러간다. 왕할머니의 시간도 그만큼 빨리 흘러갈까. 점점 음력을 세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음력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잊혀져 가고 있다. 급히 왕할머니 댁에 가서 늦은 시간에 파티 아닌 파티를 열기로 했다. 겨우 찾아간 열 한시까지 영업을 한다는 빵집에 남은 케이크는 그냥 할머니도 아닌 “왕”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기엔 다소 유치했다. 동물성 크림 위에 펼쳐진 노오란 스마일 장신구를 바라보며 못난 삼대 모녀는 머리를 맞대고 모여 이걸 사 말아, 를 논제로 토론했다. ‘없는 것 보단 낫다’는 1대와 3대의 주장에 하나 남은 스마~일 케이크를 사들고 왕할머니댁으로 향했다. 이렇게 당황과 민망과 죄송이 낭자하는 파티가 어디있나. 싶을 때 쯤, 할머니는 쿨하게 초를 부신 뒤, 졸리니 다들 돌아가라며 손짓 하셨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촛불을 한번에 불어 끄셨던 것 같은데 올해는 두번 반의 실패 후에 겨우 불이 꺼졌다. 나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괘종시계가 12시를 알리며 댕~댕~ 서글피 울었다. 나는 그 소리가 꼭 “으이구~ 이놈들아~” 라고 말하는 것 같아 왕할머니를 빤히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왕할머니도 자식들에게 음력 같은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일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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