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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집

좋아하는 것들은 왜 늘 우리를 아프게 할까

by 에그 머니 나


빨간 구두를 샀습니다.

충동적인 척 치밀한 이 충동구매의 시작은 며칠 전 버스를 놓치면서 시작됐어요.

간발의 차로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놓쳤는데, 버스가 남기고 간 바람에 잠시 시원하고 나서 바람보다 훨씬 큰 짜증이 몰려왔어요. 그리고 그 짜증의 질책은 나의 낡은 신발로 향했습니다. 밑창이 다 닳아 제대로 달리지 못한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버스를 놓치지 않을 만큼 잘 달릴 수 있는 신발을 사려했어요. 신발을 선물하면 바람난다는 미신을 웃어넘겼다가

신발을 받은 남자친구의 바람을 맛 보고서는 스스로에게도 신발을 선물하지 않았는데 (나도 도망갈까 두려웠나?) 몇 년 만에 내게 주는 선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신발을 고르자니 괜히 신중해지더군요.

해는 없는데 날은 더운 이상한 날씨에

가로수길을 한참 걸었어요. 원래 신발이 이리 비쌌나

일단 십만 원은 넘고 보는 신발들을 두어 개 신어보다가 답지 않게 구두 가게로 들어갔어요.

처음엔 에어컨이 시원해서 머무르다가 운동화보다 훨씬 싸길래 몇 번 만져보다가 조명 아래 진열된 빨간 구두를 마주쳤어요. 짧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신기엔 다소 불친절한 낮은 구두였지만 이상하게 신어보고 싶었어요.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마주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는 유난스러운 생각이 스치면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빠르게 결제했어요

상자도 받지 않고 그 자리에서 신고 나왔는데

건물에 비치는 내 발이 너무 예뻐서 괜히 또각대며 걸었어요

그 소리를 듣고 싶어서 하루 종일 걸었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물집이 생겨 있었어요. 그제야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구두는 원래 한 치수 작게 나온다고. 그 자리에서 신고 나와 무를 수 없는데 퉁퉁 부어 자국 남은 발을 보자니 기분이 이상했어요

그래도 나는 그 구두가 너무 좋아서

물집 잡힌 발을 외면하고 내일도 신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늘 나를 견디게 만들어요.

나의 빨간 구두도

영화를 두 번 볼 때 좋아하는 장면이 나오기까지 견뎌야 하는 지루한 전개도

모든 걸 다 줄 것 같았던 남자의 길어지는 연락 텀도

배꼽티를 입기 위해 참아야 하는 피자 냄새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늘 나를 서럽게 만들어요.

좋아하고 나면 결국 남은 건

물집

졸음

상처와

꼬르륵…


그럼 결국 탓하게 되는 건

그것들을 좋아하기 시작한 나


신지 말걸

잘해주지 말걸

좋아하지 말걸

좋아하지 말걸…


좋아하는 것들은 물집을 남기고

얄팍한 빅데이터에 따르면

예쁜 것들은 대부분 아픈 물집을 남겨요


너무 예쁘지 말지

너무 예쁘지 말걸


그럼 결국 탓하게 되는 건

좋아하기 시작한 나


그럼에도 나는

그 지루한 영화를 다시 보고

다시 사랑에 빠지고

빨간 구두를 신습니다


상처가 아물며 생긴 조금의 내성은

구두를 신기 전 발 뒤꿈치에 붙이는 밴드 정도의 위로를 해주며

물집이 터지며 엉엉 울었던 그날을 미루어 두고

또 좋아할 용기를 주어요

나는 그런 내가 조금은 무책임하고

조금은 대견하고

조금은 두려워요


버스를 놓친다면 더 놓치겠네요

그럼 나는 또 버스가 두고 간 바람에 시원했다가

내 신발을 탓하려나요

그래도 좋아합시다. 좋아하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 보단 물집을 터트리는게 더 빠를 것 같아서요


좋아하렵니다.

좋아합시다..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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