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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간

by 에그 머니 나

“셔터스피드는 셔터가 열려있는 시간적 길이를 뜻해.” 아빠는 검은 카메라를 들고 내게 셔터스피드에 대해 설명했다. “1초를 몇등분으로 나눌 것인지를 말하는데, 셔터스피드가 낮으면 낮을수록 더 많은 빛이 들어와. 더 밝아지는 대신, 사진이 흔들릴 수 있어.

” 아빠의 말이 잘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1초를 더 나눈다는 것이 신기하여 고개를 끄덕였다.“자, 이제 네가 찍어봐.” 아빠는 내게 카메라를 건냈다. 아빠가 잡고 있던 부분이 묘하게 따뜻했다. 나는 셔터스피드를 100에 두고 아빠를 찍었다. 철-컥 하는 소리가 나더니 사진이 찍혀 있었다. 밝기는 밝았지만대신 사진 속 아빠는 마구 흔들려 있었다. 사람이 아닌 빛이 흘러간 물결이 남아 있었다. 이번엔셔터스피드를 200에 두었다. 아까보다 좀 어두워진 대신, 조금 더 사람의 형상을 띄었다. 400, 640, 800. 숫자를 올릴 때마다 아빠가 점차 정확하게 찍혔다. 마침내 1초를 1600개로 나눈 그 찰나를 찍자, 아빠의 표정이 정확하게 찍혀 나왔다. 어두웠지만, 난 그 1600분의 1속에서 아빠의 무거운 미소를 보았다. 그저 웃는 것처럼 보였던 아빠의 표정이, 순간을 다지고 다져서야 제대로보였다. 분명 아빠의 표정이 무거웠다. 덩달아 사진이 담긴 카메라까지 무거워지는 기분이다.나는 손목이 아프다는 핑계로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사진관의 공기가 차가웠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매달 8일, 할아버지 댁에 가는 날이었다. 아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난 미간을 통해 아빠의 기분을 읽었다. 겉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아빠지만, 미간만큼은 솔직했다. 어쩌면 인간의 표정은 미간에 있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할아버지 댁에 가는 차 안이면 늘 긴장이되었다. 곧 아빠의 기분이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아빠의 인상을 흘려보내려 셔터스피드를 아주 낮게 설정했다. 철--컥 소리와 함께 아빠의 주름진 미간은 빛이 되어 흘러갔다.할아버지 댁에 도착하자 휠체어에 탄 할아버지와 급히 머리를 손질하는 할머니가 우리를 반겼다. 할머니는‘아이구 우리 똥강아지~’하며 나를 안으셨고, 할아버지는‘아이구 김작가 왔어?’ 하며 능글맞은 미소로 아빠에게 손을 건냈다. 엄마는 사과가 담긴 봉투를 잡고서 어색하게 서 있었다. 할머니는 사과를 깎아 우리에게 건냈고, 아빠는 흰 봉투를 할머니께 건냈다. 가장 어색한 순간이었다. 모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난 할머니의 얼굴에서 미안함을 본 후, 아빠의 파르르 떨리는 미간을 본 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할아버지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디선가 위태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아빠는 네 가정의 가장이다. 나와 엄마, 할머니와 할아버지, 삼촌과 고모까지. 한 집안의 장남이라는 이유로 아빠에게는 큰 짐이 얹어졌다. 아빠는 등산로에 놓인 돌탑 같았다. 돌탑의 가장아래, 가장 넓지만 얇은 돌 같았다. 촘촘하게 수많은 돌을 받들고 있는, 작은 돌 같았다. 그러다그 돌탑의 위에 내가 있을까봐 두려워졌다. 모든 돌들은 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뜻 내려갈 생각은 없어보였다. 아빠의 등은 납작하고 넓었다.할아버지는 아빠의 미간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천진난만하게 휠체어의 바퀴를 굴려 작은 카메라 하나를 가지고 오셨다. 말 없이 사과를 먹는 아빠에게“김작가, 사진 찍는 법 좀 알려줘. 명색이 사진작가 아빤데, 전시회 하나는 열고 죽어야 하지 않겠냐.” 하고 말했다.“ 뭘 사진을 찍어요.” 아빠는 퉁명스레 말했다. 내겐 다정하던 아빠가 할아버지에겐 세상 까칠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부탁에 아빠의 미간은 점점 구겨졌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미간에 할아버지가 그만하길 바랬지만, 결국 그 미간이 벌개질 때 까지 멈추지 않으셨다.“아버지! 저 피곤해요.. 그만.” 아빠는 소리쳤고, 집안은 고요해졌다. 동그래진 할아버지의 눈이 아빠를 오래도록 가르켰다. 벽에 걸린 아빠의 사진들이 아빠를 더 짓눌렀다.

우리는 할아버지 댁에 돈과 냉랭함을 남기고 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역시나 적막만이이어졌다. 아빠는 사진을 확인하는 내게 말했다.“다음에 가면 할아버지 사진 찍는 법 좀 알려드려.” 난 아빠의 말에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가 지금은 저래도,젊었을 땐 멋있는 사람이었어. 일도 잘하고, 인기도 많고..”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나면꼭 같은 이야기를 했다. 열번도 더 들은 이야기였지만, 난 묵묵히 아빠의 얘기를 들으며 카메라를 들여다보았다.아빠의 뚜껑이 열리고 나면 한동안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아빠의 모습에 대한 당황과, 시간이흐르면 나도 아빠에게 저렇게 화를 내게 될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난 어색함을 풀기 위해 아빠가 인상쓰는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ㅋㅋ 아빠 이마에 보톡스맞을까봐. 꼭 화나있는 것 같네.’ 우리의 메시지는 이 차가움을 풀자는 암묵적 신호였다. 내가 아빠의 마음을 몰래 들여다 볼 방법은 오직 미간뿐이었는데, 미간을 읽지 못하면 할아버지한테 화냈던 것 처럼 내게도 화를 내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1초를 60개로 나누고, 125개로 나누고, 3200개로 나눴다. 흘러가는 순간의 찰나를 모기잡듯 포착했다. 내 카메라 속엔 좀전까지 현재였지만 금방 과거가 되어버린 것들이 쌓여갔다. 어떤 순간은 더 조각내어 선명하게 담았고, 어떤 순간은 빛이 자유롭게 흐르도록 냅두었다. 아빠의 미간이보톡스로 인해 빳빳해진다면, 카메라를 통해 마음을 들여다 볼 생각이었다.아빠는 내 사진을 커다란 컴퓨터에 옮겼고, 우린 함께 사진을 보았다. 할머니가 깎아주신 사과, 할아버지의 휠체어 바퀴, 엄마의 가방, 검은 카메라, 인상쓴 아빠(하지만 아빠처럼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거울게 비추어진 나. 흘러가고 멈춘 순간의 조각들이 모여 내 작은 세상이 되었다. 아빠는 셔터스피드의 활용을 아주 잘했다며 나를 칭찬했다. 특히 빛의 잔상이 담긴 사진이마음에 든다고 했다. 잔상이라. 잔상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금방이라도 날아갈것 같은 가벼운 흐릿함. 아빠가 말한 잔상이 담긴 사진은, 인상을 잔뜩 쓴 아빠였다. 아빠가 이사진을 알아보지 못해서, 미소가 잔상처럼 가벼워보여서, 그리고 아직 8일이 다가오려면 한참 멀어서, 다행이었다. 아빠는 마침내 내 사진들의 주제를 물었다. 실은“아빠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었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어“사랑하는 것들이요”하고 답했다. 보톡스 때문인지, 행복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 아빠의 미간은 활짝 펴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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