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5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사랑은 단풍이다.

단풍과 은행

by 예P Mar 10. 2025

우리 동네 도로변엔 은행나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이들을 지나친다. 시간이 흐르고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은행나무는 노란색 단풍을 흩날리며 일 년이 끝나감을 알려준다.

샛노란 단풍은 언제 봐도 예쁘다. 그런 단풍은 나무의 생명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증거가 된다. 단풍을 통해 자신의 절정을 알림과 나무는 은행을 통해 자신의 끝을 준비한다. 


은행은 단풍과 달리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의 고약한 냄새 때문이다.  

하지만 은행을 밟는 건 더 싫어한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다. 은행을 밟지 않는 것은 한국에 사는 뚜벅이들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은행이 밟혀 터질 때 나는 ‘와작’하는 소리와 동시에 느껴지는 물컹하며 으직한 느낌은 꿈에서도 나올 것 같다. 더 최악은 신발 밑에 붙어있는 그것들의 잔해를 처리하고 나서도 며칠이고 가는 고약한 냄새 때문이다.  


나의 사랑도 은행나무와 같았다.  

정신없이 사랑하다 보니 마음에 단풍이 들었고, 그것이 사랑의 절정임을 깨달았을 땐 이미 마음에 은행이 가득 떨어진 뒤였다.  

SNS에 남은 사진을 지우고, 차단하고, 흔적을 없앴다. 이렇게 하면 정리가 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고약한 이별의 냄새로 가득했고, 그것을 밟을 때면 곪았던 감정이 터져서 며칠씩 날 괴롭혔다. 

이별의 냄새가 나에게 달라붙는 것이 무서워 나는 그것들은 마음 한켠에 몰아 두었다. 그렇게 하면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이따금 냄새가 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은행들을 더 밀어 넣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밤 산책을 하던 길이었다.  

3월, 생명력이 살랑거리며 싹이 트는 계절. 식물들이 생명력을 뽐내기 시작하면 인간들도 자연스레 마음에 사랑이 싹트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벌써 봄이네!…’라며 산책을 하던 찰나, 고약한 냄새가 났다. ‘이 냄새는 지금은 맡을 수 없는 냄샌데?’ 산책했던 길을 되돌아가 다시 냄새를 맡았다. 확실하다. 은행 냄새였다.  

볕이 들지 않는 사각지대, 도로 옆 인도에 붙어있는 이 공강은 나무 덤불과 컨테이너들로 둘러싸인 은행의 요새였다.  그곳엔 작년 10월에 떨어진 은행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누가 은행을 제대로 처리 안 한 거야? 이젠 썩어서 더 고약한 냄새가 나네.’ 

저 은행들은 누가 처리할까? 구청 옆이니까 구청에 얘기해 볼까? 아니야, 여태 아무도 치우지 않을 걸로 봐선 앞으로도 누군가 처리할 것 같진 않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은행 냄새가 몸에 뱄을까 봐 샤워하기로 했다. 핸드폰으로 노래를 틀고 샤워를 했다. 비투비 ‘그리워하다’가 나왔다. 몸에서 은행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바디워시를 한 번 더 짰다.  


샤워를 마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직도 은행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몸에서 나는 냄새는 아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은행들이 썩어 한층 더 깊은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까 산책하며 봤던 은행들을 떠올렸다.  


‘도로변 은행처럼 내 마음속 감정들도 방치하면 썩어갈까? 결국엔 내 마음은 온통 고약한 이별 냄새로 가득 차 버릴지도 몰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은행을 가져왔다. 은행 밑에 깔려 있던 단풍 한 장이 딸려 왔다.

‘같이 떨어졌었나 보네. 다시 봐도 예쁘다’  

단풍은 마음속에 넣고, 은행은 마음 밖으로 던져버렸다. 은행 더미를 치우다 보니 예쁜 낙엽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은행나무는 은행과 낙엽 두 가지 생명의 증표를 우리에게 남긴다. 

지난 사랑도 추억과 이별 두 가지 사랑의 증표를 마음속에 남긴다.

 

요즘 사람들은 연애를 소비하듯 하고, 이별도 삭제하듯 한다. SNS에 남은 사진을 지우고, 차단하고, 흔적을 없애는 것이 정리라고 믿지만, 그 감정은 결국 우리 안에서 썩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방치된 은행처럼 말이다. 중요한 건 그것들을 어떻게 정리하느냐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은행 냄새는 사라진다. 하지만 단풍을 손에 쥐고 있는 한, 그때의 아름다움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드라마 <조명 가게> 후기.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