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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현 Sep 04. 2024

결혼을 앞두고 재산목록을 주는 구남친


양가 상견례를 마치고 결혼식을 두 달여 남겨두고

그가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오늘 할 말이 있으니 집 앞으로 가겠다고.


이때까지만 해도 해맑던 나의 뇌는

판타지 세상이었다.

뭐지? 오늘 프러포즈하려나?

집 앞 생맥주 집에서 그를 만났다.

프러포즈받기에는 누추한 맥주집이었다.

‘뭐야? 장소가 너무 아닌데?

만약 여기서.. 한다면..

무효라고 다시 하라고 해야지’

의기양양해하며 맥주 한잔을 마시는 나에게

그는 A4용지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이걸 보고 잘 결정하라고.

돌이킬 수 있는 순간은 지금 뿐이라나?

신중하게 생각해서 확실하게 말해달라고.

이게 뭔 말이야?

어안이 벙벙했다.


열어보니 이렇게 써있었다.

가용 자산 vs 비가용 자산

이렇게 두 개의 표가 그려져 있었다.

내용은 본인의 현재 수입상태와

저금, 적금, 보험, 연금 등 본인 자산의

상세 내역을 엑셀로 정리한 것이었다.


숫자와 안 친한 나는, 다시 말해,

계산기를 10번 치면 10번 다 다른 숫자가

나올 정도로 숫자 개념이 “제로”인 뇌를 가졌다.

그런 나에게 이건 신박한 종이였으며

그런 나의 눈에는 숫자 나열이 아닌..

이렇게 보였다.

“신뢰. 신뢰. 신뢰. 신뢰. 신뢰. 신뢰.. “


문제는 오피스텔이었다.

자가로 알고 있던 오피스텔이 월세였다.

“오빠! 이거 자가라면서요?”

당황한 구남친은 눈도 못 마주치며 한 숨을 쉰 후,

“이 나이에 월세 산다고 도저히 말 못 하겠더라. ”


헉. 뭐야? 이 고백은?

말도 잘 못하는 사람이

표현은 왜 이렇게 진실되게 하는 거야?

아~짱나~~~ 공이 또 내게로 온 거야?


이억.

단 돈 이억 때문에 결혼을 엎어?

아니지!

그건 아니지!


난 그 자리에서 바로 답했다.

“알았어요”

그가 다시 물었다.

“뭘 알았다고요?”

“괜찮다고요!”라고 대답하자,

“집에 가서 잘 생각해 보고 말해도 괜찮아요. ”

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200% 신뢰라고

쓰여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했다.

아~ 이 사람 찐~이구나!

아~ 이 사람 청국장~이구나!

이억이란 돈이 없는 건 안타까웠으나

그에 대한 내 믿음은 더 깊어졌다.


그 진국은

현재까지 매달~ 한 푼의 오차 없이

한 달의 거름도 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의 표현방식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말 한! 치! 의 오차도 없이

너무 또~옥 같다.


그래~ 그가 바뀐 건 단 하나도 없구나.

단지 내가 몰랐을 뿐..

어쩌면 바뀐 건 나였을지도..

어쩌면, 날 힘들게 하는 건 나의 기대였을지도..


기대만큼 나쁜 놈은 없다.

기대만큼 내 마음을 힘들게 한 놈도 없다.

기대 말고 실전만이 날 버티게 할 지어다!

그래~ 가르치자!

학습의 기회를 주자!




내가 태어나서 두 번째로 잘한 일이 있다.

첫 번째는 두 딸을 낳은 것이고

두 번째는 남편에게 육아를 가르친 일이다.


두 딸이 3살 5살이던 해의 일이다.

전편에 썼듯이 본인이 행복한 건

모두 내 덕이라는 걸 잊어 가던 시절쯔음..

https://brunch.co.kr/@052005602ea6480/54


남편이 새벽에 들어온 것이다.


남편은 장모님을 잘 만난 관계로

육아의 비중은 5% 정도를 밑돌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의 뇌구조와 태생이 문제였다.

남자들은 밖에서 돈 버느라 힘드니

여자들이 육아와 가정살림을 하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가 아니라 ‘자세’였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그 가부장적인 기가

하늘에 닿을 듯했다.

단 한번도 입 밖으로 여성비하 발언을 한 적은 없다.

그냥 느껴졌다. 그 오만방자한 생각들이..

그 기를 꺾고 싶어서 여러 번 소리 높여 외쳤었다.


“나도 ‘집에서 육아할래?

나가서 10시간 강의할래?’

물어본다면 당연히 일하는 게 편하다고!!!”


“지금 오빠가 돈 버는 거

그중에 반은 내가 버는 거라고!!!”


물론 그의 표정은,

해석컨데..

어느 집 개가 짖냐는 정도도 안 되는 듯했다.

 

최극단의 감정 노동과

육아에서의 자아싸움 경험을 이해 못 하고

나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 남편은

날 더욱 고립시켰으며 외롭게 했다.


그리고 기분이 나빴다.

무척이나.

뭐가 그리 당당한지.


남편은 사기업에 다니는 주제에

본인이 공무원인 줄 아나 허구한 날

칼퇴를 하여 집에서 매일 저녁을 먹었다.

집에 오면 아이들 목욕은 아빠가 담당해 주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난 매 저녁을 아이 저녁과 경상도 저녁

이렇게 두 번의 상차림을 해내야 했다.


사실 이 시기는 내가 아픈 기간이었다.

(암 수술 후 3년 차였다)

https://brunch.co.kr/@052005602ea6480/16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니..

이때 나는 안간힘을 다해

정상인처럼 보이려고

정상인 이상으로 행동하려고 했던 것 같다.


어느 금요일 밤..

나의 스트레스는 극도에 다달았다.

불금을 즐기느라 전화 불통~

새벽 4시에야 들어오는 남편.

문이 열리자마자!

아주~ 때리고, 밟고, 욕하고..

혼자 온 힘을 다해 액션 영화를 찍었다.

물론 남편은 고주망태로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남편이 그 사건을 기억하는지는..

모르겠다.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때리고도 분이 안 풀렸다.

짐을 쌌다.

토요일 새벽 5시.

집을 나왔다.

친구에게 간다고 전화를 하고

친구네 집에 도착해서 전화기를 껐다.


친구네 집에서 자고 일어나서

미용실 가서 머리를 하고

밖에서 맛있는 거 사 먹고

나름 싱글 라이프를 즐기려 했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두 딸아이들이 얼마나 불편할까

심히~ 걱정되었다.

TV 전선을 끊어버리고 나왔어야 하는데..

우리 딸 두 눈이 혹사당하겠구먼..ㅠ


하루 종일 TV 틀어 줄 것이 자명했다.

그래도 속으로 기도했다.

첫째의 까칠함이 터져줄 때,

둘째가 저지레를 동시에 해 주기를!

첫째와 둘째가 싸워서 동시에 울어 젖히기를!

첫째와 둘째가 식사 준비 한다며

주방을 초토화시켜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것만이라도 경험하게 해 주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바랐다.


만 이틀 집을 나간 것이다.

다음날 일요일 밤 11시에 들어갔다.

들어가기 직전에 핸드폰을 켰다.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와 있었다.

“미안해요”라고.

또 한 줄 문장이었다.


집안으로 들어갔다.

말을 섞지도 않고 내 할 일을 했다.

집안은 예상대로 난장판이었다.

곳곳에 흔적들이 보였다.

남편 얼굴을 훔쳐봤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는걸

볼 수 있었다.

예쓰~! 예쓰~! 예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일까?


다음날 아침,

발코니로 들어오는 햇살이 아름다워 보였다!

살아갈 힘을 충전한 기분이었다~


남편은 어땠을까..?

어쩌긴 어쩌겠는가?

이게 ‘마누라’라는 사람인 걸~^^

그도 ‘그의 몫’은 있는 것이다.

메롱~ 메~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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