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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Mar 27. 2024

우울의 단면(9)

사는 게 숙제인 여자

 종업원이 무심하게 툭 내려놓은 죽 그릇에서 여름 한낮의 아지랑이처럼 뜨거운 김이 올랐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숟가락으로 휘휘 몇 번 저어두고 그동안 내쳐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고 부재중 전화 목록을 확인했다. 엄마, 몇몇 지인, 연희 그리고 외삼촌. 부재중 전화의 가장 큰 비중은 엄마가 차지했고 연락이 드물었던 외삼촌의 전화 한 통이 의외였다. 무슨 일일까 잠시 생각했는데 갑자기 밀려드는 허기에 현기증이 났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미끄덩한 죽 한 덩이가 목구멍을 쓱 타고 내려갔다. 죽의 온기가 가슴 언저리를 뜨끈하게 데웠다. 명치 아래서 음식물을 받아들이는 듯 위가 몇 번 꿀렁였다. 몇 숟갈의 죽이 들어가자 정말 신기하게 손가락 끝에서부터 힘이 나고 정신이 차려졌다. 이대로 끝낼 게 아니라면 먹고 움직이는 패턴을 규칙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죽집을 나와 바람이 잦아든 빗속을 다시 걸었다. 날이 어두운 건지, 밤이 된 건지 분간되지 않을 만큼 앞이 깜깜했다. 그 어둠 속의 숲길을 끝에서 끝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비에 젖은 바닥을 쓸고 다녔다. 드문드문 우산을 쓰고 걷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숲길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선 술집과 커피숍 간판에서 뿜어내는 얕은 빛, 길 끝 대로변에서 울리는 자동차 소음이 섞인 그 중심에서, 나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악을 쓰고 있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부재중 전화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엄마의 용건은 뜻밖이었다. 급성 췌장암 진단을 받아 외삼촌이 투병 중이었다는 것과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빗속을 헤집고 다니던 그날, 걸려 온 한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외삼촌의 마지막 인사였음을 암막 커튼이 만들어 낸 여전한 어둠 속에서 끈질기게 울려대는 엄마의 전화를 수신해 전달받은 내용이었다. 아빠의 부재를 채워주던, 무뚝뚝했지만 따뜻한 심성을 가진, 크고 다부진 체격에 빵빵하게 튀어나온 배를 가진 그를 보고 내가 곰돌이 푸 삼촌이란 별명을 지었던, 잠시 잊고 살았던, 그.  

 외삼촌의 발인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엄마의 갈라진 목소리에는 염세주의적인 색채가 농후하게 묻어나 공허함이 맴돌고 있었다. 그다지 놀라워하거나 슬퍼하는 기색 없는 내 반응에 엄마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랬다. 슬프지도,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몸을 일으켜 산발한 긴 머리칼을 올려 묶었다. 암막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끝까지 활짝 열었다. 한층 더 짙어진 봄의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쑥 밀고 들어와 방안을 훑었다.

 ‘삼촌, 잘 가. 우리 나중에 만나.’

 열린 창문으로 올려 본 하늘은 참 얄밉게도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물감을 물에 탄 듯 청명했다. 세상 만물의 이치에 어긋남 없이 모두 언젠가 죽는다. 죽음이 두렵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저 인연과의 이별이 조금 더 빠르고 늦을 뿐, 죽어서든 살아서든 다시 만날 테지. 나는 어금니를 힘주어 물었다. 숨을 크게 내쉬고 거실로 나왔다. 커튼 없이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온전히 머금은 거실에는 여전히 제 삶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식물들이 있다. 새잎의 몽우리를 머금고 목이 마른 듯 손바닥 같은 잎을 늘어뜨린 몬스테라 화분에 물을 주는데, 며칠 전 연희에게 걸려 온 전화가 떠올랐다.


[우울의 단면 10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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