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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Mar 26. 2024

우울의 단면(8)

사는 게 숙제인 여자

 몸의 감각기관을 하나씩 차단하다 보면 한곳의 신경이 예민해진다. 무겁고 맹렬하게 창틀을 내리치는 빗줄기의 파동이 몽롱한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치고 창문을 열었다. 그리곤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창틀에 튕겨 부서져 흩어지는 빗방울이 톡톡 얼굴에 내려앉았다. 또르르 흘러내리는 물기를 손으로 훔쳐내고 핸드폰과 지갑을 챙겼다. 갑자기 극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대충 슬리퍼 짝을 맞춰 신고 묵직한 현관문을 밀고 나갔다. 아스팔트에 내리치는 빗소리는 정신이 번뜩 뜨일 정도로 시끄러웠다. 전에 살던 세입자가 두고 간 우산을 펼쳐 들고 빗속의 골목길을 따라 경의선 숲길로 들어섰다. 뇌리에 남아 있는 모습보다 녹음이 짙어진 숲길이 세상을 집어삼킬 듯 부는 비바람에도 짙은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전쟁통 같은 그 숲길을 가로질러 걸었다. 우산이 몇 번이나 뒤집혔지만 그래도 부러지지 않고 자주 들렀던 죽집까지 버텨주었다. 우산을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홀딱 젖은 모양새로 죽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천둥과 번개가 하늘을 가르며 밖이 어두워졌다. 꽝 하는 천둥소리에 가게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밖을 내다보았다. 그 바람에 도로변으로 난 가게 입구에 들어선 내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순간 누군가 내 심장을 꽉 움켜쥐는 통증에 가슴이 찌릿해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구석진 자리로 들어가 도로변을 보고 앉았다. 빈속으로 며칠을 지낸 터라 위에 부담을 주지 않는 쪽이 나을 거 같아 채소죽을 주문하고 멍하니 통창으로 크게 보이는 밖을 바라보았다. 텔레비전 화면 조정시간처럼 일시 정지된 채로.

 연희의 언니 장례식장에 다녀온 뒤, 나는 한동안 지리멸렬한 상태로 단 하루도 견뎌내기 어려울 만큼 불안정한 날들을 보냈다. 무엇에서 발현되는지 알 수 없는 우울감이 극에 달했고 형체 없는 그것이 나를 점점 바닥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대로 두면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직감했다. 제발로 정신건강의학과에 찾아갔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이와 마주한 그 순간에 의사 가운을 걸치고 앉아 있는 상대가 나를 도와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일면식도 없는 의사에게 매달릴 만큼 나는, 절박했다. 하지만 상담 시간이 흐르면서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의사의 태도에 마음이 상했다. 병원을 나서면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살고 싶으면 힘을 내서 살아. 구차하게 남한테 구걸하지 말고.’

 그리고 다시 캄캄한 방으로 돌아왔다. 여러 날을 계속 잠만 잤다. 먹지도 않고 잤다.


[우울의 단면 9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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