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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t mom Nov 28. 2024

자기 연민

<맡겨진 소녀>--"내가 제~일 불쌍해!!!!" (리듬미컬하게)

     '자기 연민' 만큼 무서운 무기가 없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로 상정하고, 나에게 상해를 입힌 남편을 먼저는 타인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그 타인이란 존재는 내 아이들과 내가 바쳤던 시간과 내 수고로움이 녹아져 있기에, 긍정이든 부정이든 의미 부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들 말하듯,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손해를 보지 않고 헤어질 수 있을까. 헤어지면 행복할까. 헤어지는 순간 내 아이들이 빗나가지 않을까. 사춘기 시절에 놓인 아이들이 엇나가면 어쩌지... 그 아이들과 밤늦게 까지 떠들고 웃고 노래하고 즐길 수 있는 시간들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것은 아닐까. 내 망상의 시작은 자기 연민이다.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다. 아직 복수를 시작하지도 않았다. 복수의 명분과 의미를 다시 상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학생들과 북클럽에서 읽고 있는 책은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Foster)이다. 주인공인 어린 소녀

<맡겨진 소녀>가 영화로 만들어졌고, 이 씬은 작품이 영화화된 <말없는 소녀>의 한 장면이다. 

 "나"라는 화자가 외딴 사람들에게 맡겨지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고 자녀들이 많아 엄마가 힘들기 때문에 당분간 화자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위탁된다. 그런데 이야기의 시작에 아버지가 차로 이 어린 소녀를 데려다주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에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이 참 기괴하게 느껴진다. "아빠는 조수석에 모자를 내던지더니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피운다.... 이제 아빠는 나도 데려다주었고 배도 채웠으니,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한 대 피우고 그만 가고 싶은 것이다. 늘 똑같다. 아빠는 어디에서든 뭘 먹고 나면 오래 머물지 않는다."(19)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대부분의 가장의 전형이다. 자신의 식욕과 감정에 충실한 아버지. 주변에 있는 가족의 마음과 감정에는 항상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장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늘 똑같다'라는 말이 내 가슴을 후벼 판다. 


    관계라는 것이 2+2=4라는 정확한 수치로 계산이 가능한 것일까. 부부가 싸울 때 내가 이렇게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했냐라고 그렇게 수없이 말해도, 상대가 인정하지 않으면 계산은 형성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관계라는 것이 말이다. 나 스스로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지라도 남들이 보기에는 배부른 소리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 연민은 '주관주의의 침몰'을 드러낼 뿐이다. 유명한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현대인의 맹점은 모두 '주관주의의 침몰' 속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 첫 번째 내 명분은 사라지는 것인가. 동일한 주관주의적 관점을 가진 자들이 모이면 내 명분에 좀 합리성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 치사하다. 나 스스로 치졸해서 더 이상 글을 써야 하나 싶다. 바로 당신의 거짓말 때문에,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물건을 파는 보부상처럼 이 학교 저 학교를 돌아다닌다! 전국 일주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걸 알아?라고 하면 네가 커피 마시며 놀 때 나 역시 그렇게 해서 돈을 벌었다고 하겠지. 내가 언제 커피 마시며 놀았냐, 아이들 키우며 아버님 뒷바라지 했지라고 하면 언제 네가 했냐 아버님은 혼자 알아서 잘하셨다라고 하겠지. 끝이 없다. 소모적인 싸움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내가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부모님의 모습, 나는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자녀들의 눈에 늘 똑같은 아버지, 어머니의 이미지. 벗어날 수 없다면 그다음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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