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의 윤리>와 <관계의 윤리> ? - 우리에게는 무엇이 더 유용한가.
시대가 변한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변한 시대의 어조와 결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딴 나라에, 외딴 성에 갇혀 있거나 잠시 외출한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항상 말없이 홀로 밥을 먹은 후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남편이 그렇다. 그런데 나는 가족에 대한 남편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남편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나무와 같다. 물과 햇빛과 영양분을 주면 자란다. 관계 속에서 이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왜곡되고 뒤틀려 메말라 버린 나무와 같다. 그래서 결국은 찍어 버려야 하는 꼴이 된다.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남편은 자신의 아버지와 한평생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아버님께 말도 걸고 차로 드라이브라도 좀 해 드리라고 해도, 부자 관계는 말을 안 해도 다 서로의 마음을 안다고 했다. 독심술을 가졌나? 마음이 보이나? 사랑을 몸으로 한다는 의미는 마음을 보이는 수단이 바로 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사랑을 온몸으로 하셨던 분들이 바로 내 어머니와 같은 분이다. 자신은 사라지고 늘 가족과 자녀밖에 없었다.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남성은 "판단의 윤리"를 하는 존재이고 여성은 "관계의 윤리"를 하는 존재라고 말이다. 양귀자의 <모순>에서 두 어머니의 유형이 나온다. 한 어머니는 현모양처와 같은 전형적인 K-어머니다. 자식이 속을 썩이고 남편이 알코올 중독에다 치매로 고달프게 하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불굴의 의지로 에너자이저가 되는 어머니. 다른 한 어머니는 남편의 풍요로운 경제력과 오만한 물질주의로 인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너무나 외로운 어머니다.
내가 화가 난 부분은 내 후배가 전자의 어머니의 유형에게 MVP를 주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온몸으로 맞서 이긴 어머니. 그 시대가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는 강하다"는 미명 하에 나에게도 그런 미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미덕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역경과 고난에 강해야만 한다는 어머니상, 누구를 위함이지 묻고 싶다.
우선 어머니 자신은 아니니까. 수혜를 가장 많이 입은 사람은 아버지다. 다음은 자녀들이다. 망나니 같은 아버지와 자녀들을 위해 어머니가 희생하는 것쯤이야 인가. 나중에 안다고? 아니 모른다. 양귀자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무렴한 자(염치없는 자), 그 남편은 끝까지 모른다. 치매에 걸렸으니 완전히 모를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무렴한 자를 위해 무엇을 할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