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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게임과 스파게티

화해 그리고 평화

by 성희

여고동창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틀 내내 높은 통굽 구두를 신고 통영시내를 을 누빈 탓일까,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종아리가 뻐근하게 비명을 질렀다. 낯선 공기처럼 감도는 딸과의 어색함이 피로를 가중시키는 듯했다. 그저 방으로 쏙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뿐인데, 딸이 닌텐도 스위치 조이콘을 흔들며 댄스 게임을 제안했다.


​75인치 대형 TV 화면에 팝아트처럼 화려한 아바타가 등장했다. 몸치 중의 몸치인 내가 이길 승산이야 없지만, 댄스를 향한 열정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법! 층간 소음 방지용 두꺼운 카펫 위에서 결의를 다졌다. 비록 동작은 허우대만 멀쩡하고 박자는 엇나가기 일쑤였지만, 화면 속 아바타를 필사적으로 따라 했다. 특히, 통굽 구두 후유증으로 다리는 무겁기 짝이 없어 손동작만 어설프게 흉내 낼뿐이었다. 미끄러지지 않는 카펫이 오히려 뻣뻣한 내 몸에겐 또 다른 시련이었다.

​“Ok", Super!”, “Perfect!” 완벽한 동작이 나올 때마다 조이콘에서 '찌이찬' 하고 승리의 신호음이 울렸다. 기계는 솔직했다. 댄스 실력은 딸이 한참 위였지만, 이상하게도 첫 곡부터 세 곡 내리 나에게 승리가 돌아갔다. 아마도 온몸의 피로를 잊고 몰입한 열정 점수였을까.

​잠시 휴식을 선언한 딸

시작한 김에 혼자 도전해 본다. 내가 고른 곡은 아바(ABBA)의 '댄싱 퀸(Dancing Queen)'. 내 학창 시절을 수놓았던 팝송이 흘러나오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노랫말에 담긴 추억까지 끄집어내며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엄마! 뒤에서 보니까 춤추는 거 진짜 웃겨!"

​딸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멈칫했지만, 그 웃음이 싫지 않았다. 어색함으로 굳어있던 벽이 무너지고, 함께 박장대소하는 순간 우리 사이엔 오랜만에 따뜻한 활기가 감돌았다. 다음을 기약하며 댄스 게임을 종료했지만, 이미 온몸은 재충전된 느낌이었다.


​몸은 천근만근, 샤워 후 침대에 몸을 던지려는 찰나, 아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녁 식사를 거른 채 온 아들을 위해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스파게티를 삶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면을 휘젓는 서툰 내 모습을 본 딸이 부엌으로 오더니, 조용히 내 손에서 뒤집개를 가져갔다.

​"엄마, 비켜봐. 내가 해줄게. 오늘 댄스 게임 이겼으니까 내가 쏜다!"

​딸이 만들어준 스파게티는 내가 만든 것보다 훨씬 촉촉하고 윤기가 흘렀다. 아들은 "누나 고마위!"를 외치며 맛있게 접시를 비웠다.

​댄스 게임으로 시작해 밤늦은 스파게티 만찬까지. 온종일 쌓였던 피로가 달콤하게 풀리고, 차갑던 집안 분위기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스파게티 소스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데워졌다. 뻐근했던 다리만큼이나 굳어있던 마음까지 풀린, 진정 행복하고 감동적인 하루의 마무리였다.


댄스 게임이 녹여낸 어색함은, 함께 만든 따뜻한 스파게티로 완벽하게 채워졌다. 무거운 침묵 대신 웃음과 배려가 오가는 밤. 몸의 피로 대신 마음의 충만함이 가득한, 진정한 친화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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