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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나들이

by 성희

3달 전 형부가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아직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언니 곁에서 그저 묵묵히 손을 잡아줄 뿐,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다.

​형부의 병환이 깊어지기 전, 1년 전부터 계획했던 일본 차박 여행을 떠나야 했다. 72일간 홋카이도로 가는 피서차박여행이었다. 기일을 미루면 영원히 못가게 될 수도 있었다. 고민끝에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형부가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살아계시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떠난 지 열흘 만에 형부는 영원히 잠드셨다.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남편은 형식적인 위로를 건넸지만, 귀국 후 추모공원에 가는 길은 결국 혼자였다. 남편은 그 마지막 기회마저도 외면했고, 친정과의 단절을 끝내 선택했다.

​어떤 앙금으로 시작되었는지, 남편은 내게 친정 식구들과의 교류를 일절 금했다. 지난 5년간, 나는 남편과 친정 가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마음을 졸여왔다. 친정의 크고 작은 행사, 어머니 생신, 아버지 제삿날에도 갈 수 없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 홀로 참아온 세월이었다. 남편과 나의 금도 이로부터 심화되었다.


일본차박을 끝내고 부산 집으로 이사 후 20여년 살림을 맡아주었던 남편에게 리타이어의 시길을 주었다. 3개월간 홀로 여행을 떠났다. 힐링타임은 남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나도 족쇄가 풀린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제일 먼저 부산에 사는 언니에게 달려갔고, 오늘은 드디어 그리던 언니와 함께 친정집으로 향한다. 갈등없이 떠나는 것이 좋다.


​87세의 어머니가 홀로 계시는 집.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진주 주간노인보호시설을 다니시는 어머니를, 온전히 집에서 쉬시는 일요일에 찾아뵙기로 했다. 어머니 곁에서 하룻밤 자고 월요일 아침에 돌아오는 여정.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의지대로 향하는 친정 가는 길은, 오랜 가뭄 끝에 만난 단비처럼 온몸 가득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오랜만에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형언할 수 없었다.

​고속도로에 들어선 후에야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미리 말씀드리면 너무 기다리실 테고, 조금만 늦어도 걱정하실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전화를 드리자, 마침 진주 남동생 부부가 함께 와 있다고 했다.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동생부부는 텃밭에서 땅콩을 뽑고 간장을 떴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벌써 다했다. 올케는 점심 식사를 준비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은 올케가 차렸지만, 여든이 넘은 어머니는 여전히 '입으로' 지휘하고 계셨다. 60이 다 되어가는 아들과 며느리, 환갑을 넘은 딸들을, 아직 덜 자란 십 대 자녀 대하듯 하시는 그 모습이 변함없어 미소 지었다.

​동생 부부는 텃밭 일과 간장, 된장을 장독에 담는 일을 마친 후 오후에 집으로 돌아갔고, 큰딸과 작은딸, 우리 자매만 남았다.


어머니가 정성껏 기르신 땅콩을 삶아 냈다. 알은 굵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손맛과 사랑이 담겨있어 그 어떤 것보다 고소하고 달았다. 어머니는 마치 1년 치 밀린 숙제를 하시듯, 그동안 쌓아두었던 이야기보따리를 술술 풀어놓으셨다. 어머니의 일 년이 고스란히 담긴 이야기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월요일, 아침 일찍 돌아와야 하는데 어머니는 "하룻밤만 더 자고 가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셨다. 큰딸과 작은딸이 함께 모이는 일이 드물기에, 그 애틋함이 더욱 크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가슴이 미어졌지만, 우리도 집에서 할 일이 있기에 다음을 기약하며 포옹했다.

​장롱 면허인 언니 대신, 이제 두 달에 한 번쯤은 내가 운전해서 꼭 친정을 찾기로 약속했다. 누구의 억압도 없이, 오직 나 혼자의 의지와 사랑으로 어머니 곁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겹도록 감사하다. 남편과는 앞으로도 이렇게,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같이 있는 날과 떨어져 있는 날이 반복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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