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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모임에 가다. 여고 동창회

by 성희

​'동양의 나폴리' 통영에서 다시 소녀로!


​가을의 초대장, 반백의 여고 동창회

​남편에게 3개월간의 '홀로 차박여행'이라는 특별 포상 휴가를 선물하고, 잠시 공시생 아들 뒷바라지와 살림에 전념하는 전업주부의 생활을 한다.

여유로운 생활, 지루한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 가을은 너무 많은 초대장이 날아 든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회, 총 동창회. 소그룹끼리의 모임이다.

몇개는 지나치고 몇개는 참가한다. 대부분은 안가지만 갈까말까 망설이다가 참석한 모임이 있다. 여고 동창회 전국 모임! 단발머리 날리며 파란 베가방 들고 진주 시내를 누비던 우리가 어느덧 반백의 시간을 훌쩍 넘긴 이 시점, '동양의 나폴리' 통영에서 다시 뭉치기로 했다.

​통영은 푸른 바다에 아름다운 윤슬을 수놓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폴리'라는 이름처럼, 올망졸망 섬들이 모여 겹겹이빚어내는 장엄한 해안선은 아름다웠다.

​오랜 세월 쌓인 그리움을 푸른 바다와 윤슬 아래서 녹여내고, 다시 열여덟 소녀로 돌아가기로 한 가슴 벅찬 약속. 우리는 각자의 일상이라는 무거운 껍질을 벗어던지고, 설렘과 들뜸으로 가득 찬 낯선 여행객이 되어 통영으로 향했다. 통영으로 향하는 길목에서부터 우리는 이미 세월을 거슬러 단발머리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 집앞까지 나를 데리러 온 친구의 차에 부산친구 4명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여고시절 같은 기억을 가진 우리가 펼치는 이야기는 마치 끝없이 이어지는 옛날이야기 보따리 같았다.


​"야, 너 아직도 고등학교 때 교련한다고 운동장에 모이면 비봉산 보았던 것 기억하니?"

"그럼! 바람이 불면 잎이 뒤집어져 은색 카페트가 되었지. 행진하다 그늘 잍에서 쉴 때 참 좋았어. 그게 벌써 사십 몇 년 전 일인데, 어쩜 엊그제 일 같니!"

"그때 박근혜온다고 공설운동장에 가서 카드섹션했던 것도 기억나? 진주의 세개의 여고가 연합해서 그것도 한달 동안이나 연습했던 것!"

"그럼, 쉬는 시간에 학교대표 노래자랑도 했지. 박미령친구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지금도 생각나. 어쩜 그렇게 노래를 잘 했을까?"

"미령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동창회 한번도 안나오네"


​웃고 떠드는 사이, 창밖으로 보이던 논밭들은 높은 건물과 아스팔트길로 변했다가 점차 바다의 비린내 섞인 짠내와 확트인 바다조망으로. 바뀌어 갔다. 그 바다는 그렇게, 우리를 '소녀 시절'로 데려다 주는 비밀의 문이 되었다.



​이순신공원에서 세자트라 숲으로: '솔밤시 길'에 흐르는 하모니

​우리의 첫 여정은 이순신공원에서 시작되었다. '통영의 나폴리'라 불리는 이곳, 수백 년 역사의 물결을 품은 장엄한 바다는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대첩의 현장이다. 좌대가 높아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장군의 동상 앞에서, 우리는 잠시 왁자지껄한 수다를 멈추고 숙연해졌다.

​장군의 동상은 망망대해를 굽어보며, 임진왜란 초기 승승장구하던 영웅의 기백을 영원히 붙잡아 둔 듯했습니다. 불멸의 영웅이 바라보던 그 푸른 바다를 함께 보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경외심이 일렁였다. 그분이 없었다면, 이 아름다운 바다도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리라는 깨달음.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을 지탱하는 거대한 뿌리다.


​전망대를 지나 해안데크와 흙길을 걷자, 남파랑길 28코스의 일부인 솔밤시 길이 펼쳐진다. 솔밤시는 '솔방울을 밟는 소리'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 아닐까?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엮어 만든 울창한 숲! 숲은 마치 세월의 때를 씻어주는 자연의 정수기 같았다.

이 황홀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데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놀랍게도 예고 없는 음악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단 한 명의 선창이 신호탄이었다.

​"종달새 나르는 강언덕 저넘어 내마음 알아줄 그님은 있을까?"

"목장길 따라 밤길 거닐어--",

"beautiful beautiful brown eyes---"

"내게 바욜린있다면 내게 바욜린있다면 온세계를 다니며--"

​고등학교 반별합창경연대회에서 불렀던 그 노래들, 2부, 3부 화음들도 들린다. 아직도 기억하는가보다. 이제는 모든 반들의 대합창이다. 50명의 합창단이 꾸려졌다. 바닷가 데크길에 합창곡이울려 퍼진다. 각자의 목소리가 오랜 세월의 간극을 넘어 하나의 멜로디로 엮인다. 마치 실제 합창대회가 열리듯, 푸른 바다와 솔숲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하모니가 울려 퍼졌다. 그때 그 시절, 서툰 화음을 맞추며 깔깔대던 열여덟 소녀들의 영혼이 우리를 지배하는 듯했다. 그 순간, 우리들은 시간을 거슬러 단발머리 그 시절의 감성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깔깔대며 걷다 보니, 산을 넘어 바다 조망이 빼어난 세자트라 숲에 닿았다. '세자트라'는 '세계를 아우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습지와 메타세콰이어 길을 걸으며 보이는 바다조망이 멋있다.쪽빛 바다는 수많은 섬을 품고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촤르르르' 몽돌 해변을 쓸어내는 물결 소리는 도시의 소음을 깨끗이 잊게 해주었습니다. 푸른 바다의 기운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우리는 오래도록 잊고 있던 '자연의 숨결'로 가슴을 가득 채웠다. 솔방울 길을 걸으며, 우리는 통영의 첫 페이지를 장엄한 역사와 순수한 우정의 하모니로 채워 넣었다.


​통영옻칠미술관: 천년을 견딜 '영원한 빛'을 좇아

세자트라 숲을 지나 포장도로를 조금 걸으면 통영 옷칠박물관이 있다.

​나전칠기의 고향 통영. 칠기는 이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는 옻칠의 깊은 흑색 위에 영롱한 빛을 품은 자개가 놓여, 단순한 공예품을 넘어 '시간을 담는 예술'이다.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천연 옻칠이 주는 칠흑 같은 광채가 우리를 압도했다. 자개장 같은 전통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현대미술의 세련된 감각과 전통예술 혼이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러 빛깔의 자개들이 붙여지고 검은색 뿐만 아니라 깊고, 맑고, 무한한 깊이를 가진 색들이 칠해진 작품들은 고요한 우주 같았다. 양과 음은 마치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옻칠의 깊은 흑색 위에, 영롱하게 빛나는 자개 조각들이 놓여 태양처럼 빛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한 친구는 머리가 작품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자개가 발산하는 빛의 양이 다르며 자개를 먼저 붙이고 색칠을 했을 것이라한다. 물감이 자개 위쪽에도 칠해져 있다한다.


​옻칠회화의 거장, 김성수 관장의 작품들은 전통을 넘어 현대 예술로 승화되어 있었다.

감로는 손톱보다 작은 무수한 자개 조각들이 가느디 가는 세로선을 그리다 마지막에 물방울 한방울이 맺혀혀 금방 떨어질듯 하다.

주로 교사출신인 우리는 그 작품을 보고 설명하려한다.

일교차가 큰 환절기, 포화수증기가 물방울이 되는 과정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듯하다. 낮에는 더워 수증기를 많이 품고 있던 대기에서 갑자기 온도가 낮아진 모두가 잠든 밤에 감로수가 만들어질 것이다. 수증기는 작은 물방울이 되고 작은 물방울은 큰 물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그건 이슬이잖아

감로도 이슬일까?

작품속에는 아직은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은 감로수 방울들이 매달려 있다.


다음은 전시실에는 산과 학과 통영의 모습을 한 작품이 있다. 조용히 보고만 있던 친구들은 여기서 사진을 찍는다. 형상이 있어 머리로 생각하기보다 눈으로 즐기는 작품이 더 좋은 것 같다. 자개의 은은한 빛은 어느 장르의 작품들보다 마음을 정화시켜주었다.

​옷칠은 바로 선조들의 집념 어린 장인 정신이 우리에게 전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헌신적인 손길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깊은 울림을 주는 빛의 예술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빛을 담고, 시간을 담아내는 나전칠기는 통영의 예술혼 그 자체였다.


​윤이상 기념관: 고향을 향한 슬픈 멜로디와 경계인의 고독


​다음 여정은 우리들의 여고 선배인 박경리문학관으로 가야 했지만, 아쉽게도 리모델링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대신 간 곳은 윤이상 기념관이다. 유명한 음악가인 것은 알지만, 솔직히 나는 그의 음악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2층전시실에서 해설사가 꼼꼼하게 해설도 해주고 사진도 찍어 주었다.

윤이상 소목장이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을까요?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음악은 나무와 자개의 결처럼 촘촘하고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생가터에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여행의 가장 깊은 울림을 주었다.


년에 태어난 그는

​한국에서 39년간 거주 그는 무엇을 계기로 음악을 공부하려고 유럽으로 갔다. 처음 머문 곳은 프랑스였는데 선생의 사고와 맞지 않아 독일로 옮겼다.

독일에 거주하는 중 그는 1963년에 에 있는 강서대묘의 사신도를 보러 북한으로 여행을 갔다. 사신도는 그의 인생에 깊은 울림을 주었으며 라는 작품을 탄생 시켰다한다.


그는 강서대묘에서 꿈에 그리던 사신도를 마주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무덤 속에서 처음에는 벽화의 윤곽조차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마치 1,400년의 시간을 거슬러 방금 칠한 듯 적, 백, 청, 황의 색채가 강렬하게 빛을 발하며 제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났습니다. 그 생동감과 색의 힘은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특히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모습은 저에게 깊은 충격과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한 순간의 주저함 없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휘둘러진 듯한 그 유려하고 힘찬 필선!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 기세에서 저는 고구려인들의 웅혼한 기상과 진취적인 예술혼을 느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한국 정신의 실체였습니다.

​사신도는 단순한 네 마리의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네 마리의 신수가 각자 다른 방위를 지키고 있지만, 그들은 완벽하게 균형 잡힌 긴장 속에서 하나의

​이 놀라운 영감을 저는 음악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고구려인의 웅대한 기상을 담은 이 그림이야말로 저의 음악적 본질을 완성해 줄 실마리였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4중주곡 《이미지(Images, 영상)》**입니다. 저는 오보에(청룡), 첼로(백호), 바이올린(주작), **플루트(현무)**에 사신 각각의 역동적 기운을 담아냈습니다. 각 악기는 사신처럼 독립된 존재이지만, 하나의 앙상블 속에서 서로 긴장하고 조화하며 궁극적인 질서를 빚어냅니다.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저에게 단순한 예술적 감동을 넘어, 제 민족의식과 음악적 철학의 뿌리가 되었으며, 평생을 두고 제 서재에 걸어두고 쳐다볼 가장 소중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강서대묘를



​기념관 곳곳에서 우리는 그의 슬픔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간첩'이라는 억울한 낙인이 찍혔고, 평생을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기념관에 재현된 "나의 아이들아,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피로 쓴 그의 유언은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습니다.

​고향 땅을 향한 그리움은 그의 음악에 깊은 슬픔의 색채를 입혔습니다. 살아서는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베를린 서재에서 평생을 **'경계인(디아스포라)'**으로 살았던 천재 음악가의 고독한 삶. 그의 음악은 고향과 분단된 조국에 대한 애절한 진혼곡이었을 것입니다.

​기념관을 나오자, 정일근 시인의 시구처럼, 통영의 바람은 선생의 슬픈 멜로디를 담아 휘돌아가는 듯했습니다. 분단과 이념의 폭력 속에서 찢겨야 했던 한 예술가의 삶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통영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이 땅에 새겨진 뼈아픈 역사의 흔적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그는 동백림사건으로 간첩으로 엮였고 우리나라에서 감옥생활을 하다가 독일에서 동료들의 구원활동으로 독일로 건너가 귀화하게 된다. 그리고 조국, 고향에는 죽어서 돌아왔다.


​통영의 밤을 보다: 평화의 은하수가 흐르던 밤


​하루의 여정이 마무리되고, 통영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저녁식사 후에도 친구들은 아쉬움에 세병관의 미디어아트를 보고 가기로 했다. 주차를 하는 사이 먼저 온 친구들이 남망산에 올라 있다고 했다. 야경이 볼만하다며 다른 친구들도 올라오라한다.

어둠이 내려앉은 남망산, 그 산책로를 따라 흐르는 빛의 물결이 감동적인 서사를 엮냈다. 남망산에 발을 들이는 순간, 낮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황홀경이 펼쳐졌졌다. 길을 따라 섬세하게 설치된 야간 조명들이 마치 땅 위에 쏟아진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벽화마을인 동피랑과 서피랑에 이어 이곳은 디지털피랑 디피랑이라고 부른다한다.

​이 빛은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것을 넘어, 공원의 나무와 조각상들을 살아있는 예술 작품으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물든 미디어아트 디피랑 등의 빛줄기는 고요한 밤하늘 아래에서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며, 걸음걸음이 꿈결 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이제 건너편으로 가는 길이 바뀌었다.

​남망산의 빛나는 산책로를 지나, 이제 고요히 빛나는 다리를 건너기로 했다. 이 다리는 단순한 통로가 아니다. 현대의 화려한 빛과 수백 년 역사의 공간을 연결하는 '시간의 문턱'이다. 다리 아래로 보이는 통영의 야경은 밤바다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고, 다리를 걸으며 환호성을 지르는 우리는 이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신비로운 여정의 주인공이 되었다. 조명의 은은한 물결에 발을 맞추어 걸을 때마다, 가슴은 벅찬 기대감으로 고동쳤다.


​다리를 건너 마침내 도달하는 세병관으로 가는 길. 이곳의 야간 조명은 다른 어떤 빛보다도 엄숙하고 장엄하다. 웅장한 망일루와 지과문을 지나 세병관에 가까워질수록, 조명은 수백 년 전 통영을 지켜냈던 수군들의 염원과 기백을 은은하게 비춥니다. 특히 2025. 한국유삱덩 미디어아트 평화의 은하수'처럼 미디어아트로 되살아난 빛의 향연은, 세병관의 거대한 건축물 위에 펼쳐지며 순식간의 역사적 공간으로 변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세병관의 야경은, 고난을 이겨내고 이 땅에 평화를 심고자 했던 조상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게 한다. 이 길은 단순한 관광로가 아니었다. 통영초교를 나온 친구가 느티나무를 보고 추억에 잠깁니다. 지금은 학교의 건물이 옮겨갔지만 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친구를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가곤 했던 곳이라했다. ,옛날에는 세병관 건물 하나만 있었는데 지금은 삼도수군통제영의 건물을 다 복구시켜 놓은 듯 했다. 나무와 담장 모두 밝혀 놓은 은은한 빛들은 매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한달간의 미디어아트 공연 기간에만 빈ㄱ힌다고 한다.



​2025 삼도수군통제영

​ '통영'이라는 지명 자체가 '통제영'에서 유래했을 만큼, 이곳은 300년간 조선 수군의 심장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중심 건물인 세병관 앞에 섰을 때, 야간 조명만 볼 수 있었고 그 건물의 위용은 볼 수 없었지만 그 크기와 장엄함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세병관의 이름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挽河洗兵)'는 숭고한 의미를 담은 현판! 이 넓은 마당에서 수많은 장수들이 조국 수호를 위해 전략을 논했을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우리는 운 좋게 2025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펼쳐진 국가유산 미디어아트 **'통제영, 평화의 빛'**의 핵심 프로그램인 **'평화의 은하수'**를 경험했습니다. 단순한 빛의 향연을 넘어, 깊은 울림을 주는 장엄한 예술 경험이었습니다.

​세병관의 웅장한 목조 건축물은 밤의 장막 속에서 거대한 캔버스가 되었고, 그 위로 쏟아지는 빛과 영상은 400년 역사의 무게와 평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동시에 담아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빛이 **'신성한 물(水)'**이 되어 통제영을 감싸 안는 연출이었습니다. 푸른빛의 은하수가 세병관 지붕과 기둥을 타고 흘러내릴 때, 마치 전쟁의 상흔과 피 묻은 병기를 씻어내는 듯한 정화(淨化)의 의식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빛은 단순히 건물을 밝히는 조명이 아니라, **'칼날 대신 별빛을 끌어오고 복수 대신 공존을 위한 믿음을 쌓고자 했다'**는 행사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했습니다.

​라이브 퍼포먼스가 더해진 주말 저녁에는 몰입도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배우들의 움직임과 홀로그램이 어우러지며, 은하수의 정령과 수군들의 영혼이 평화의 빛 아래 하나 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관람객들에게 벅찬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평화의 은하수'**는 호국(護國)의 상징인 통제영을 평화(平和)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습니다. 역사적 유산과 첨단 미디어아트의 결합이 이토록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통영의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 빛과 역사가 공존하는 이 순간은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청소년수련원에서 맺은 '영원한 우정의 닻'

​통영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품에 안긴 통영 청소년수련원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요즘 시설과는 달리 커다란 방, 8명씩, 10명씩 하나의 방을 배정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불편했으나, 이 또한 그 시절 수학여행을 갔을 때 배정받은 방과 분위기가 비슷했습니다.

​"야! 너 그때도 코 골았는데, 아직도 고는구나!"

"조용히 해! 내가 언제 그랬어!"

​피곤함이 묻어있었지만, 우리는 제일 큰 방에 모였습니다. 오십여 명의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육십대 중반에 들어선 우리들이 장기자랑도 하고 진주여고로 사행시도 짓고 게임도 했습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이크를 잡고 그 시절 유행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친구들의 모습에 배꼽을 잡았습니다.

​점차 재미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 시절의 정신연령을 넘기지 못하고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턱을 괴고 친구의 장기자랑을 바라보는 시선, 어깨를 주무르며 "잘한다!" 환호하는 목소리, 이 모든 것이 마치 1970년대의 한 장면을 복사해 온 듯 생생했습니다. 몇 년간 쌓인 스트레스가 한 방에 풀리는 듯한 해방감이 몰려왔습니다.


​우리는 푸른 바다의 영웅을 만났고, 천년을 견딜 영원한 빛을 좇는 예술가의 집념을 보았으며, 고향을 그리워한 음악가의 슬픈 멜로디를 들었습니다. 통영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었습니다. 겹겹이 쌓인 우리의 세월처럼, 역사와 예술, 자연의 이야기가 깊이 엮인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눈 동창들과의 밤은, 마치 통영의 푸른 바다에 닻을 내린 배처럼 고요하고 따뜻했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었지만, 우정은 시간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웃음소리는 그 어떤 보석보다 영롱했고, 우리의 추억은 그 어떤 역사보다 웅장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지만, 통영의 아름다운 빛과 숭고한 정신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한 우정의 등대가 되어 반짝일 것입니다. 다음에 다시 만날 그날까지, 우리는 통영이 선사한 이 감동과 추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다음에 꼭 다시 통영에서 만나자!"

​푸른 바다의 도시 통영이, 다시 소녀가 된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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