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산소통을 매지 않은 해녀는 깊은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쳤다.
그 가벼운 자유로움이 나는 눈물이 날만큼,
부러웠다.
갑작스럽게 흐르는 눈물이 너무 창피해 얼른 볼을 훔치고는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실은 자연스럽지 않은 걸 알고 있었다.
어른 여자가 아무데서나 울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종종 아무데서나 운다.
커피숍에서 얘기하다가 울고, 친구랑 즉석 떡볶이를 먹다가도 울고, 수영장에서도 운다.
누군가가 옆에서 울면 말할 것도 없이 같이 울고, 소설책을 읽다가도 운다.
여배우처럼 울고 싶지만, 콧물이 나와 그게 안된다.
나는 울보다.
이런 내가 상담을 하며 그동안 눌러왔던 아픔들을 꺼내놓자니 가관이 아니다.
진료실의 부드러운 티슈는 늘 채워져있긴 하지만, 티슈에게 송구하다. 자꾸 콧물을 닦아서..
의사 선생님은 내담자들의 눈물에 익숙하시겠지만,
나는 창피하다. 그만 좀 울고 싶다.
사방팔방 여기저기에서 그만 좀 울고 싶은 게 내 소망이다.
나는 왜 해녀가 자유로워보였으며,나는 왜 자유로운 해녀의 모습에 눈물이 났을까?
나는 그 자유가 어째서 그토록 부러웠을까?
나는 자유롭지 못한 걸까?
무엇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걸까?
숨을 쉬기 위해 내가 매야만 했던 산소통에는 무엇이 들어있었을까?
내가 살기 위해 어깨에 메야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깨끗하게 세탁된 가족들의 옷을 개며, 따듯한 물에 담긴 그릇들을 달그락거리며, 창문을 열어 묵은 공기를 빼내며,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내가 좋아하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펼치며, 창밖의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며, 나는 내 어깨에 메어진 그 무거운 산소통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 것일까...
그 안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다.
불안과 두려움은 나를 지켜주는 감정이었다.
어린 시절 나를 지켜줄 울타리가 존재하지 않던 순간들에, 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불안`이었다.
불안은 나를 조심시켰고, 그로 인해 나는 나를 지킬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불안은 내가 어떤 상황을 통제하지 못할 때 크게 증폭되었다. 그래서 나는 매 순간 상황을 통제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반대로, 통제되지 않는 상황 근처에는 접근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로운 것, 예측 불가능한 것은 멀리하고, 익숙한 것, 예측 가능한 것들 속에만 나를 있게 했다.
내 어린 시절은 그렇게 채워졌다.
호기심에 술을 입에 댄 적 있지만, 담배는 중독이 두려워 손대지 않았고, 방황하던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절대 이성교제는 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나를 만나겠다고 학교 앞까지 찾아온 그 아이를 거절했던 날에 나보다 몸집도 키도 크던 아이가 나를 순순히 놓아주지 않으려 함을 느낀 후,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공포적 상황이 되어 나를 몹시 두렵게 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나를 지켜줄 이가 없어 불안하기도 했지만, 나를 지키기 위해서도 불안을 선택했다.
내 어깨에 메어진 무거운 산소통 안에는 `불안` 이 들어있었다.
살기 위해서 선택한 `불안` 이란 감정이 나를 살기 힘들게 만든 것이다.
행복한 순간에 행복하지 못하게 하고, 잠을 못 이루게 하고, 만성 위장염을 앓게 하고, 만성 두근거림을 만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불안으로 숨을 쉬면서 살아왔지만,
그렇게 통제 가능한 것만을 고집하며 자랐지만,
이상하게도 성인이 된 이후의 행보는 어릴 때와는 다르게 세상 여기저기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백화점에 다녔고, 복지시설에서 일했고, 산부인과에서 일했고, 생각조차 해본 적 없던 인도로 떠났고, 정신 탐구를 위해 스스로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고, 지금은 글을 쓰고 있다.
이게 뭐지... 도대체 이 인생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제 나는 나를 살리기 위해, 내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산소통인 `불안` 을 내려놓아야겠다. 해녀의 깊은 자유로움을 경험해봐야겠다.
무거운 산소통 없이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해야겠다.
땅 위에선 산소통이 필요 없으니까.
가벼운 몸이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