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상실된 것은 다시 찾을 수 없다.

메이저가 아니라 마이너로 살겠습니다.

by 흔들리는 민들레





오직 한 사람


오직 한 사람의 상실의 시대


김금희 작가는 소설 [오직 한 사람의 차지]에서 오직 한 사람이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상실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권태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상실을 그렸다. 작품 안에서 상실에 대한 충분한 애도가 그려졌다면 그 작품은 내게 아픔으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읽은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작품을 떠올릴 때 여전히 가슴이 저릿한 이유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상실을 애도하지 않은 채 여전히 상실에 머무르는 채 끝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에 그들은 여전히 상실의 아픔을 권태로 가린 채 살아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은 인간을 결정론적 존재로 보았으나 아들러나 칼 로저스는 인간을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것이 상실된 것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회복과 복귀는 다르다. 회복은 상처 위에 새살이 돋는 것이지만 복귀는 잃어버린 것의 도래다. 아들러나 칼 로저스가 주장한 것은 한 사람의 내면적 힘과 회복이지 잃어버린 것의 도래는 아니다.


인간은 어떤 것을 상실할까. 살이 지나 열한 살이 되면 열 살을 상실한다. 스무 살이 지나 스물 하나가 되면 스무 살을 상실한다. 기억이 간직 것까지 상실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나는 그것을 회복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스무 살이 지나 스물한 살이 되며 스무 살에 대한 상실감이 회복되는 것이지 스무 살 자체가 다시 도래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상실 속에서 살게 된다. 매 순간 상실을 마주하것은 고통스러우므로 상실을 권태로 덮어버리 한다.








애도


상실에 대한 애도


인간의 삶은 크고 작은 상실로 가득 차 있다. 지나간 상실물, 지나간 상실의 대상은 절대 도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처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다. 어차피 그것조차도 상실될 거라며 권태를 뒤집어쓰는 대신 새로운 것들을 만드는 일은 회복을 불러온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행위 아래에는 상실에 대한 인정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에야 우리는 그것을 애도할 수 있고 애도해야만 회복할 수 있다. 나는 매일 상실을 애도하며 살아간다. 애도한다는 것은 아파하는 나를 측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아픔 그대로를 인정하는 일이다. 통증을 자각하고 통증과 함께 머무르는 일이다. 그래서 나의 어딘가는 항상 아파하고 있다. 제나 상실을 애도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사다리 던져버리기


인간다운 인간


언제나 아파하고 있다는 것이 나를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 가 아프므로 타인의 고통 무감할 수 없게 하며 남을 이기는 기쁨보다 공존하는 기쁨을 더 느끼게 한다. 인간이므로 마주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기심 앞에서 멈추고 성찰하게 한다.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상실한 것이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수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삶을 반복 아닌 새로움으로 채워나갈 때 그때에야 비로소 삶은 복사물이 아닌 창작물로서의 빛을 발할 것이다. 고유의 삶은 상실로서 가능해진다.다리를 타고 절벽에 올라갔다면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