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일을 <열심히>한다. 열심히 한다는 것은 원하는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이다. 공무원시험 준비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고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체력과 건강을 위해서나 멋진 몸매를 위해서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다.
어떤 일을 열심히 했다는 것은 결과로써 알 수 있다. 오른 성적으로 알 수 있고, 시험 결과로 알 수 있고, 삶의 활력으로 알 수 있고, 멋진 몸매가 된 것으로 알 수 있다. 혹은 누군가의 인정으로도 알 수 있다. 너 달라졌구나? 너 성적이 올랐구나? 수고했구나? 멋져졌구나? 대단하다. 존경스럽다. 등등.
열심히 했다는 것의 증거는 대부분 증명되는 결과나 타인의 인정이다. 그렇다면 증명되지 않거나 타인의 인정을 얻을 수 없는 결과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걸까?
성과와 성취
열심히 했지만 그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애쓰고 노력한 시간들이 가치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것을 넘어 수치심이나 자책감도 든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분류하고 규정하고 정의하는 방법을 교육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또한 성취도 그렇게 정의 내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분류하거나 정의를 내릴 수 없으니까 없는 것처럼 느낀다.
과거의 노력이 지금 내가 원하는 결과로써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가치도 어떤 소용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지만 확고하게 믿지는 않는다.
발효와 부패의 한 끗
눈에 보이는 성취만 성취가 아니다. 수치나 성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의 내면에 쌓여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더 깊어지고 익어가는 성숙의 시간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성장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는 성숙의 시간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고 또 다른 이의 성과로 내가 이룬 성과의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성숙은 어떤 누구와도 비교하거나 견줄 수가 없다.
성숙은 단 하나도 같은 모습이 없다. 각자의 개성과 독특성이 그 성분을 이루기 때문에 그렇다. 성과가 공산품이라면 성숙은 장인이 만든 명품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숙은 장인의 명품처럼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똑같은 것이 없다. 한 땀 한 땀 다 같아 보이지만 다른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결과나 세상의 기준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만의 노력에 몰입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성숙하게 발효된다. 결과에 연연하며 익어가기를 거부한다면 깊이 없는 성과만 거두게 된다. 그런 성과는 마음속에서 오래가지 않는다.
발효와 부패의차이는 단 한 끗이다. 익어가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용했느냐 스스로를 기다려주었느냐와 익어가기를 거부하고 다른 기준을 들이댔느냐에 있다. 익어가기를 허용한다면 발효되지만 익어가기를 거부한다면 부패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