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거실에서 술에 취한 삼촌은 누나를 붙잡고 서럽게 훌쩍거렸다. 엄마는 그런 삼촌을 보며 눈물을 훔쳤다. 어린 나는 문 뒤에 숨어 두 사람의 신파를 훔쳐보았다. 그때 엄마의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자기 연민? 자기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삼촌에 대한 연민?
그렇게 남매의 아름다운 신파가 신파로만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중년의 건장한 삼촌은 툭하면 엄마에게 5만 원만, 15만 원만, 혹은 있는 대로 돈을 빌려갔다. 누나가 그렇게 안타깝고 불쌍하다면, 다만 얼마라도 주고 갔더라면 좋았을텐데 불쌍하다면서 돈을 빌려갔다. 가난한 집에 형제도 많아서 대여섯 명이 그런 식으로 엄마에게 돈을 빌려가고 조언이랍시고 식당을 차리게 해서 몇 천만 원을 손해 보고 그랬었다.
이후에 갚았는진 모르겠지만, 그때 어린 내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은 다 큰 성인 남자가 단 돈 5만 원이 없고, 15만 원이 없다는 점이었다. 잊을만하면 술을 먹고 찾아와 그랬으니까. 힘도 세고 키도 크고 뭘 해도 엄마보다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어 보이는 삼촌이 단돈 5만 원 15만 원이 없다고? 그것도 종종?
믿음
그때 품었던 막연한 의구심이 내가 그들의 나이가 되고 나니 풀리게 되었다. 그들이 내게 했던 말들, 내가 듣든지 말든지 여과하지 않고 쏟아냈던 타인 비하적인 모든 말들은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그저 겁쟁이일 뿐,무엇도 아닌 사람들이었다.
친정엄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는 말들이 최고이고, 그들이 아는 지식이 최고라고 여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아주 미숙하고, 아주 의존적이고, 아주 겁쟁이이고, 아주 천박한 데도 친정엄마는 반대로 생각하며 나도 그렇게 생각하길 바라고 그래서 내가 선을 그을때 마구 화를 낸다. 마치 사이비 종교의 신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지금은 친정엄마와 연락을 끊었지만 종종 그때 생각이 난다. 그때 내가 본 신파는 동생이 누나를 가엾이 여긴 것도, 누나가 동생을 가엾이 여긴 것도 아니었다. 피해의식에 절은 각자의 자기 연민이었을 뿐. 자기가 그저 피해자일 뿐이라는 태도의 밑바닥에는 채워지지 않은 의존성이 있다. 본인 인생의 주인공은 본인이고,그 주도자가 본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의존성의 상태는 모두를 빈곤으로 밀어 넣었다.
눈물은 그렇게만쓰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자기 연민에만 눈물을 쓰는 사람은 타인에게 쓸 눈물이 없어 언제나 억울하고 고통스럽다. 그런 사람은 타인에게 쓸 눈물이 없기 때문에 공격성만 쓴다. 난 억울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데 세상은 자기를 소외시키고 고통스럽게 한다고 한다.
자기 연민은 자기가 가엾고 안쓰러운 것이지만 애도는 의미 있는 것의 상실을 가슴 아파하는 것이다. 상실을 인정하는 것이 애도인 것이다.엄마와 삼촌은 상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상실이 있는지도 모른 채 닥치는 대로 결핍을 메우고자 했다.
삶에는 모든 종류의 상실이 예약되어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의 상실, 젊음의 상실, 과거의 상실, 아름다운 날들의 상실, 기억의 상실, 의미 있는 대상의 상실, 그동안 믿어왔던 신념의 상실, 그동안 가져왔던 가치관의 상실 등등..
눈물은연민에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애도에도 사용해야 한다. 자기 연민이나 분노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애도의 시간이다. 애도의 시간을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을 그들이 참 가엾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