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혐오하지만 살아간다

나의 우울증에 관하여 #11

by 라미

한 달에 한 번씩 약을 받으러 가는데 근무시간 때문에 병원을 못 가서 어쩌다 약이 부족할 때가 있다. 그럴 땐 너무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이번에도 거의 임박해서 병원에 방문했다. 그리고 이번엔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서 상담도 하였다. 약만 받아 가다가 이야기를 하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술은 이제 거의 끊었어요. 마시지 않고 있고 조절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깐 중독 관련된 약은 빼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일 때문인지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자꾸 눈물이 나요. 기분이 자주 가라앉고 조절이 안 돼요. 우울증 약은 용량을 좀 더 올려주세요"


"중독 약은 빼고 우울증 관련 약은 용량을 올려드릴게요. 대신 속이 메스껍다거나 두통이 심하게 오면 한 알만 복용하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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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째 다니다 보니 할 이야기도 많이 없고 용량 조절할 때만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 듯하다. 처음엔 주치의 선생님에게 많이 의지했고 무언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에 나를 숨 쉬게 해주는 건 주치의 선생님과의 상담도, 심리상담사와의 상담도 아닌 약이었다. 약뿐이었다. 심리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용량을 늘리고 난 후로 좀 더 숨쉬기 수월해진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술도 거의 끊었다. 약의 효과인지, 아니면 내 체력이 못 버텨 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쉽게 끊어진 술이 참 신기했다. 평생을 못 끊어서 죽을 때도 소주병 안고 관에 들어갈 거라 생각했는데.


이젠 술 대신 약에 의존을 하고 있는 듯하다. 안 먹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하지만 이것도 언젠가 그 언젠가 내가 좀 더 나아지면 천천히 줄일 수 있을 거라고 열심히 긍정 회로를 돌리고 있는 중이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 엄마, 아내의 모습도, 직장 생활도 나름대로 충분히 하루하루 잘 해내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격려한다.


열심히 하고 있지만 나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은 그냥 흐르는 대로 맡기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부분까지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하고 채찍질을 한다면 너무 스스로에게 가혹한 게 아닐까. 남들에겐 친절하면서 왜 스스로에겐 자꾸만 그렇게 가혹해지는 것일까.



무언가에 호기심도 관심도 별로 없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으며, 사람도 물건도 그 어떤 것도 좋아하는 것보단 싫어하는 것이 더 많다. 그리고 한번 관심이 가더라도 오래가지 않으며 그것 또한 사람이며 물건이며 취미이며 모든 게 해당된다.(16년간 지속되는 결혼생활은 백 프로 남편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스스로가 세상 살기에 참 부적절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유일하게 지속되는 것이 있다면 독서 정도일까.... 그래도 배우고 싶은 건 한 번씩 생긴다. 이전에 도자기공예가 그러했지만 한번 다녀온 후 흥미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엔 첼로라는 악기가 머릿속에 스멀스멀 들어오는 중이다. 이건 또 얼마나 갈 수 있을까. 그럴만한 여유도 시간도 없는데 왜 자꾸 생각나는 건지 모르겠다.


몸도 생각도 무거워지지 말자. 스스로에게 되새기듯 반복한다. 무엇이든 가볍게 받아치자. 인간혐오이지만 아직은 세상에 섞여 살아야 하니깐 너무 날카롭고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자.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고 잘 안되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자. 계속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설득을 한다. 미워하고 욕해봤자 나만 화나고 나만 눈알이 뒤집어지는 것뿐이니. 현명하게 생각하자. 계속 계속 하염없이 설득하고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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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죽기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너무 좋고,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은 너무 아름답다. 라흐마니노프의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을 들으며 파란 하늘의 하얀 구름을 바라보고 있으면 경이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 척박한 이 세상 속에서 피아노 소리 하나로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마법 같은 사실.




Right now there's sorrow

지금의 그 슬픔

Pain.

그 괴로움

Don't kill it

모두 간직하렴

and with it the joy you've felt.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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