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다. 가라앉는다.

나의 우울증에 관하여 #12

by 라미



어렸을 적엔 비 오는 날이 좋았었는데, 지금은 싫다.

축축하고 눅눅하고 곰팡이 낀 그런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이 좋지 않다.

어제 좋았던 것이 오늘 싫을 수 있고, 어제 싫었던 것이 오늘은 좋을 수 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두서없고 믿을만한 게 되지 못한다.

약을 먹어도 무엇을 해봐도 감당이 안 되는 마음에 처음으로 성모마리아 상을 집에 들였다.

기도를 하면 좀 더 나아질까 싶어서.

왜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하고 그토록 열광하는지 어렴풋 알 것 같기도 하다.

도저히 답이 안 보이는데 죽을 수는 없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질 때

종교는 좋은 대상이 되어주는 듯하다.

그래서 나 또한 감당이 안 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다.

마음이 안정되기를 기도하고 이 삶이 평온하게 유지되기를 기도한다.


저번에 병원에 가서 약의 용량을 조금 더 늘려서 그런지 먹으면 자꾸 잠이 온다.

신경안정제는 잠이 올 수 있지만 우울증 약은 그렇지 않다고 했었는데

나는 약을 먹기만 하면 멍해져서 몸이 늘어지게 된다.

예전엔 눈뜨고 있는 게 싫어서 자꾸 나를 재우고 싶었는데

이제는 너무 자버리니 스스로 느끼기에도 체력이 너무 떨어져서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지친다.

그래도 작년까지는 필라테스를 꾸준히 해서 간신히 버텼던 몸이

올해는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것 같다.

체력을 길러야 하는데 그럴 마음도 그럴 힘도 남아있지 않아서 어쩌나 싶다.

무너진다
가라앉는다

여기가 바닥이라 생각했는데 더 깊은 심해의 공간이 있어서 자꾸만 더 가라앉는다.

나 자신을 스스로가 구원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니는 이 우울증은 손 하나 까닥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게 하는 듯하다.

원하는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다.

즐겁거나 행복하기를 바라기보단 이 먹먹하고 답답한 마음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냥 아무것도 없이 좀 평온했으면 좋겠다.

가면을 쓰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도 되고, 이런 부족하고 초라한 나라도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가정을 지키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간다.

배우고 싶다는 욕구와 행복함의 영역은 따로인 건지

읽고 듣고 배워도 그것 또한 큰 충만함은 들지 않았다.

행복은 순간의 찰나이라던데 나는 그 또한 바라지 않는다.

다만 고요하고 싶을 뿐이다.

외부의 고요가 아닌 내면의 고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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