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쿼카의 하루 Sep 25. 2024

병아리와 나

유년기(2)

  우리 반에는 예빈이라는 여자아이가 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꽤 하는 편이다. 100m 달리기를 특히 잘한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하얀 피부를 가졌다. 키는 중간 정도이다. 언젠가 나는 예빈이와 교문 앞에서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학교 수업이 끝나고 각자 교문 근처의 문방구에서 어물쩡 거리며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교문 바로 앞에는 커다란 상자에 병아리들을 가둬놓고 1000원을 받고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장시간 햇볕에 앉아 있어야 되기 때문에, 피부는 까맣게 그을렀고, 모자를 썼다. 예빈이와 나는 병아리 아저씨 앞에서 만났다. 우리 둘은 모두 병아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노란 솜털이 난 몸에 부리는 단단하니 제법 야무져 보였다. 예빈이 나를 불렀다.


  "명석아"


  나는 병아리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한다. 왜?


  "나 병아리 사고 싶은데, 나 지금 주머니에 500원밖에 없어"


  나는 예빈이 하는 말을 그저 듣고 있었다. 나는 예빈이 어떤 말을 할지 대충 예상이 갔지만, 일단 들어는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500원 줄테니까 너가 병아리 사고. 번갈아가면서 키우는 거 어때?"


  일단 앞에 한 말은 어느정도 예상했던 것에서 빗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뭐라고? 내가 잘못들은건지 다시 한번 물어보았으나, 예빈은 내가 처음 알아 들은대로 다시 풀어서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누가 가져가서 안돌려주면 어떡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예빈은 병아리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번에는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내게 애원하듯 말했다.


  "약속할게. 절대 그런 짓 안할게. 명석아 나 꼭 저 병아리 키워보고 싶은데 당장 돈이 없어서 그래."


  예빈이 가리킨 곳에는 병아리 한 마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병아리는 다른 병아리들과 다르게 색깔이 특이했다. 쪽빛에 가까운 털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나도 500원 있으니까. 막상 나도 그 파아란 병아리를 보자마자 그 친구를 꼭 사고 싶은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예빈에게 재빨리 손을 내밀어 500원을 받고, 아저씨에게 동전 두개를 건넸다.


  나는 그 병아리를 빨리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에 손을 얼른 내밀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나와 동시에 손을 내민 예빈에게 병아리를 쥐어주었다. 학생, 레이디 퍼스트 몰라? 아저씨는 엉성하게 빠져있는 치아를 드러내며 말했다. 나는 예빈에게 내일 꼭 학교에서 만나서 병아리를 전달해 달라고 약속을 받았다. 그리곤 풀이 죽은 채 집으로 걸어갔다. 그래, 배가 침몰하면 여자와 노약자와 어린아이부터 구한다는데, 이렇게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




  예빈은 다음날 하교길에 왠지 모르게 나에게 쭈뼛대며 다가와 병아리를 건넸다. 그런데 푸른빛의 병아리를 바닥에 두고 잘 살펴보니, 어제보다 조금 힘이 없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다. 왜 그런지 조금 의아했지만, 우리 집에 병아리를 들여온다니 무척이나 기뻤다. 나는 기쁜 나머지 간식도 건너 뛰고 가벼운 걸음으로 집까지 걸어갔다. 두 손에는 병아리가 담겨있다. 집에서는 미리 챙겨놓은 모이와 물을 챙겨 주고 베란다에 병아리가 살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병아리의 이름을 줄리라고 지었다. 사실 예빈이가 어떤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른다. 우리 가족이 부를 땐 줄리라는 이름을 쓸 정이다.



  줄리는 우리 집에 온 지 1시간이 채 되지 않아서 시름시름 앓았다. 어찌 된 것인지 모이도 잘 먹지 않고 물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그리고 집이라고 만들어 놓은 상자에는 들어가지 않고,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대거나, 바닥에 픽픽 쓰러져서 좀처럼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줄리가 꼭 살아있기를 바랐다. 기도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줄리는 얼마 가지 않아서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엄마와 아빠는 좋은 곳에 갔을 거라는 말을 하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나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슬픔이 조금 가시자 나는 어떤 생각으로 인해 정신이 번쩍 들어서 매우 초조하고 힘들어졌다. 도대체 예빈에게는 어떻게 말을 털어놓아야 할까.


  나는 이제 큰 일이 났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어떻게든 살릴 수만 있다면 줄리가 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언가가 죽은 이후로 다시 살아났다는 기록은 얼핏 들어본 성경 이야기밖에는 없다. 나는 줄리를 살릴 수 없다면, 줄리가 아닌 다른 병아리로 대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줄리는 세상에 둘도 없이 신기하며 희귀한 푸른빛의 병아리이다.



  나는 집 주변의 페인트 가게에 갔다. 황급히 친한 친구들에게 연락하고, 머리에 있는 기억을 되짚어본 결과 새로 산 병아리의 털에 페인트 칠을 하면 잘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묘안을 떠올렸다. 얼른 페인트 가게에 가서 5000원 짜리 약통같은 용기에 담긴 파란색 페인트를 샀다. 페인트집 아저씨는 내가 나타나서 찾는 물건을 말하는 걸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 했다. 큰 의심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엄마 심부름 때문에 산다고 하는 말로 다행히 넘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 길로 학교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서 병아리 아저씨가 오늘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천만 다행으로 아직도 아저씨는 교문 앞에 남아서 병아리를 팔고 있었다. 나는 노란 녀석을 하나 샀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떴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1000원을 건넸다.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은밀한 장소, 즉 화장실에서 거사를 치렀다. 병아리를 한 손에 쥐고, 집에 있는 수채화 붓을 이용하여 파란색 페인트를 줄리 2호에게 발랐다. 줄리 2호는 몸부림을 치듯 고개를 까딱거리며 파란색으로 염색되어져 갔다. 미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써 굉장히 어려운 작업 중에 하나였다. 거사가 끝나자, 짙은 파란색을 띄게 된 줄리 2호의 털은 애석하게도 서로 뭉쳐서 볼품없이 변했고, 기름기가 흐르듯 광택이 났다.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망했구나.



  엄마와 아빠는 나를 예전과 다르게 넘어가려는 기색이 없으셨고, 크게 혼을 내셨다. 회초리를 들고 종아리를 조금 맞는가 싶더니, 마음이 약해진 엄마는 아빠에게 바톤을 돌렸다. 그리고 아빠는 매우 엄중한 목소리로 "저기 벽보고 손들고 서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는 4학년 학생일 뿐이었으니까.


  손을 계속 들고 있다보니,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들어야 할지 점점 내려야 할지 모를 순간도 찾아왔다. 줄리나 줄리 2호가 살았어야 나 또한 살았을 것이다. 나는 줄리들의 죽음을 애도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쓴 페인트가 운수 좋게 친환경 페인트여서 그가 살아 무사히 예빈이네 집에 도착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제서야 나는 줄리가 살아남았음을 축하할 그런 사람인가 보다.

이전 02화 다른 방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