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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의 하루 Sep 26. 2024

피보나치 수열

  나는 아침에 일어나 러닝을 나가기 전에 수학 교재를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 놓는다. 조금의 예외조차 허용하지 않을 듯한 각진 모서리의 양장본이다. 표지에 쓰여있는 폰트마저도 옛 것의 느낌이 난다. 번들거리는 책 표지를 잡고 쭉 펼쳐서 훑어본다. 중간에 헷갈렸던 개념들이 나왔던 장(章)을 집중적으로 읽는다. 필요할 때는 노트에 빠르게 필기한다.


  내가 조금 헷갈렸던 부분은 수학 1 과목의 '지수와 로그'라는 개념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응용해서 푸는 문제는 상당히 복잡했다. 여기서는 거듭제곱(같은 숫자를 거듭해서 곱하는 일)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구구단처럼 2의 n 거듭제곱을 미리 외워두면 무척 편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편리한 수준까지 암기하는 것이다. 나는 어제 인터넷에서 웹서핑을 하던 중 기네스북에서 어떤 인도인이 파이(원주율)을 49분동안 1만 2천 자리까지 외웠다는 말을 들었다. 그 사람은 본인만의 방법으로 뇌를 최대한 활용해서 그 일을 해낸 것이다. 직관적으로 놀라울 수 있지만, 나는 사실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경의를 표하는 쪽이다. 인간의 한계란 우리의 직관을 뛰어 넘고, 담장을 겨우 뛰어넘는 수준에서부터 완전히 초월하는 수준까지 다양하다.


  나는 그래도 2의 거듭제곱을 최대한 많이 외우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지수 함수를 다루는 문제를 풀 때 이것을 외워두면 꽤 편리하다는 것을 이미 체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친김에 2를 1번에서 20번 제곱하는 숫자까지 외우기로 계획한다. 2의 20승은 1048576 이다. 나는 오늘 오늘 트레이닝복을 입고, 러닝화의 끈을 묶으면서 그 숫자가 나올때까지 2의 거듭제곱을 계산하는 일에 집중할 것을 결심하며 문을 나선다. 머릿속으로 2의 5승부터 시작한다. 2의 5승은 32이다. 하천길을 향하며 잡생각이나 걱정을 몰아내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2의 20승이 1048576인 것을 도출하는데 결국 성공했을 무렵이었다. 다른 외울 거리를 생각해보려던 찰나 나는 누군가 익숙한 얼굴의 내 또래와 마주쳤다. 교복을 입지 않고 사복을 입었다. 자세히 보니, 혁준이다.


  "명석이 아니야?"


  나는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해주었다. 그러니 혁준이 나에게 묻는다.


  "이 시간에 뭘 하고 돌아다니는거야? 그리고 왜이렇게 생각에 잠겼어?"


  나는 약간 당황한 바람에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2의 거듭제곱 외워. 그리고 내친 김에 피보나치 수열도 외우려고"


  혁준은 약간 멍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더니 주먹을 쥐고 내 배를 때리는 시늉을 한다. 내가 영문을 몰라하며 가만히 있자 혁준은 주먹을 금방 펼쳐서 내 배를 쓰다듬는다.


  "특이한 건 여전하네"


  혁준은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혁준을 바라보며 그가 초등학생 때보다 약간 더 어른스러워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금새 궁금해졌다.


  "너는 왜 여기에 있어?"


  "나도 자퇴했어 임마. 너랑 같아"


  혁준은 나의 어깨에 손을 툭 올려놓으며 말했다. 혁준은 자신이 다니는 중학교에 오랫동안 결석해서 '정원 외 관리 대상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강제적으로 퇴학을 당하는 일만 남았다고 했다. 나와 같은 절차를 밟은 것이다. 나는 혁준에게 다시 물었다.


  "무슨 일로?"


  "몰라, 나도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입시 준비하려고. 주변에 같이 다니던 애들이 다 이상해졌어"


  혁준은 고개를 돌려 치아 사이로 침을 찍 뱉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창호가 특히. 걔는 자꾸 도박쪽에 손을 대서. 하튼 무식한 놈은 도박에 손대면 안돼"


  혁준은 씁쓸하다는 듯이 말한다. 나는 어디서 공부하냐고 물었다. 혁준은 짧게, 학원 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무슨 학원에서 공부하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혁준은 갈 곳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말을 이어가려다가 더이상 붙잡지 않으려고 했다.


  "핸드폰 줘봐"


  혁준은 나에게 핸드폰을 받아서, 자신의 번호를 찍어준다. 연락하고 싶으면 꼭 해 임마. 혁준은 마지막으로 어깨를 툭 때리고 가던 길로 총총 사라진다.


  나는 꽤 홀가분한 동시에 쾌활한 마음이 불쑥 들었다. 새삼 돌이켜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나는 계속 혼자였다. 부모님이 일을 가시기 전에 밥을 차려놓고, 아침을 먹으면 나는 혼자 덩그러니 집에 남겨져 있고, 도서관에 읽을 책을 보러 간다. 그리고 운동을 하는 새벽 시간만 빼면 거의 집에만 있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하루종일 떠나지 않는 날들이 반복될 즈음에 혁준을 만난 것이다. 나는 기쁘고 충만한 기분이 들어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피보나치 수열을 반복하는 일을 다음으로 미루고, 하천길로 들어가는 굴다리에서 나와 발을 지면에 구르며 달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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