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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의 하루 Oct 01. 2024

발명가의 사랑 2

  "내가 그렇게 별로인 사 같지는 않은데"  


  나는 혁준이 하소연을 하는 것을 그저 듣고 있다. 혁준의 딱한 사정을 알게된 나로써는 그저 들어주는 것이 혁준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


  "오지를 한번 뒤져봐라. 어디 나만큼 유능한 남자가 있나"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약간 끄덕인다. 그리고 이호진 선생님이 우릴 위해 몰래 공수해온 맥주캔을 약간 마신다. 혁준은 거의 한번에 다 마실 기세로 맥주캔을 들이켰다. 이윽고 젖힌 고개 위로 맥주캔을 들어서 허공에서 맥주 방울을 하나둘씩 떨어뜨린다. 마치 맥주의 한 방울이라도 아깝다는 듯이 거친 동작으로 털어낸다. 그러던 중 혁준의 후줄근한 흰색 카라 티셔츠에 맥주 방울이 약간 묻었다.


  "에이씨, 소개팅 때문에 새로 산건데 이거 빨아야겠네"


  신경질을 내듯 입가를 팔로 닦아내고, 혁준은 내게 호진쌤에게 맥주 더 있는지 여쭤볼까하는 말을 건넨다.


  "더 마시고 싶으면 내가 한번 여쭤볼게"


  바닥에 앉아있던 혁준은 나에게 고맙다고 하고, 한숨같은 탄식을 뱉으며 두 팔을 뒤로 짚은 채 천장을 바라본다.


  나는 학원의 어떤 방을 빠져나와서 복도를 걷는다. 그 방은 학원에서 수강생들을 위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한 용도로 가끔씩 활용된다. 넓고 텅 빈 공간의 한 가운데 우리는 바닥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한 기념 겸 혁준의 슬픔을 달랠 목적으로 맥주를 한 캔 하고 있었다. 호진이, 라는 별칭에서 이호진 선생님(호진쌤)으로 다시 불리게 된 그 선생님께서 축하의 의미로 혁준과 나에게 맥주 두 캔을 선물했다. 혁준은 이게 웬 떡이냐는 표정이었고, 나는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기에 어리둥절한 마음이었다. 호진쌤 진짜 멋있는 사람이야. 혁준은 처음엔 쾌활하게 웃으며 맥주캔을 앞에 두고 말했었다. 혁준의 말을 듣다보니 혁준이 오늘 소개팅 자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괜찮았는데, 나같은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더라고"


  혁준은 욕을 짧게 뱉으며 저주 섞인 말을 한다. 너 어디 잘 되나 보자.



  검정고가 끝나고 혁준은 자신의 친한 친구로부터 예빈이라는 여자아이를 소개받았다. 처음에 서로 소개받을 때는 잘 찍힌 사진과 연락처를 미리 교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혁준은 예빈이 마음에 들었고, 예빈도 혁준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혁준은 말했다. 소개팅을 주선한 친구가 별로 도움을 줄 필요도 없이 둘은 자연스럽게 카톡을 하며 서로에게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고, 소개팅 날짜를 잡게 됐다. 때는 무더운 날씨가 점점 찾아오는 7월의 중순. 혁준은 소개팅을 한다고 해서, 아주 깔끔하고 왼쪽 가슴에 유명 브랜드 로고가 수놓아진, 흰색 카라 티셔츠를 샀다. 인터넷으로 일주일 전에 구매했는데, 사이즈가 맞지 않아서 반품을 하고 소개팅 전날 오프라인 매장까지 찾아가서 구한 혁준이었다. 그만큼 그 옷이 마음에 들었고, 소개팅을 위한 아주 좋은 징크스가 될 것임을 예감했다고 혁준은 그랬다.


  그런데, 10시까지 소개팅 장소로 가야했던 혁준은 그만 전 날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늦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소개팅 장소인 시내의 카페에 도착하기 까지는 택시를 타거나 뛰어가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평일 아침 시간이었던 당시에는 차가 조금 밀렸고, 이상하게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혁준은 약속 시간에는 늦을 수 없어서 어떻게든 뛰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혁준은 발바닥에 불이라도 붙은 심정을 뛰기 시작했다. 횡단보도가 여러 개가 있어서, 그 사이 구간마다 빠른 속도로 뛰지 않는다면, 10분은 더 넘게 늦을 것 같다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혹여나 혁준이 늦는 것에 화가 나지 않을까, 바람 맞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처연해하고 있지는 않을까 심장이 터지고 땀이 비오듯 했다고 한다. 결국 혁준은 대로변 (혁준의 말에 의하면 거지같은) 횡단보도를 다 지키고, 끝까지 뛰어감으로써 약속 장소에 5분 정도 늦은 걸로 만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카페에 들어선 혁준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온 몸이 땀투성이어서 옷은 아예 젖어 아래로 축 늘어져 있을 지경이었고, 장발이었던 머리도 정신없이 떠있었으며, 앞머리는 이마에 붙어있다시피 했다. 땀냄새가 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문에 들어서서 인사를 하기까지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게 느껴지더라고, 결국 내가 자리에 앉으니까 거의 뭐 씹은 표정이 되더라"


  결국 혁준은 그날 예빈을 붙잡는데 실패한다. 처음부터 안 좋은 인상을 주었다고 믿은 혁준은 자신감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둘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거나, 정적에 휩싸이는 시간이 한참동안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나는 혁준이 예빈의 사진을 한번 보여준 것을 기점으로 내심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혁준의 하소연을 듣고만 있는 건 그대로지만, 예빈의 정체를 알아버렸기에 혁준을 향한 안타까움은 왜인지 온데 간데 없었다. 예빈은 초등학생 때 나랑 같은 학교 같은 반데 다니던 친한 친구였다.


  "더위와 땀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노벨상을 받아 마땅해. 그런 점에서 캐리어라는 사람은 쩌는 위인이야"


  혁준은 취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정말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예빈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어떤 아이였는지 속으로 기억해내고는 나도 모르게 반갑고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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