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때 만난 이예빈이라는 여성이 지금의 내 아내이자, 세계백신연구소 소장되는 사람일세"
명석이 말하자, 재필은 깜짝 놀라서 이야기한다. 아, 그럼 첫사랑이라고 하신 분은?
"첫사랑은 사실 사람이 아닐세. 발명 그 자체이자, 나의 예비 발명품들이지"
명석은 껄껄 웃더니, 갑자기 옆에 있던 서류가방을 열어 뒤적이며 수첩 한 권을 꺼낸다.
"내가 아직도 가지고 다니는 나의 보물 1호일세"
명석은 투박한 디자인의 수첩을 보여주었다. 갈색 하드 케이스가 덮여있는 앏지도 두껍지도 않은 수첩이다. 명석은 수첩을 열어서 안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페이지마다 빼곡히 글씨로 채워져있는 구깃한 종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직접 보여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혹시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두어도 됩니까?"
명석은 수첩을 다시 열어서 쓱 훑어보더니, 잠깐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내가 펼친 페이지는 마음껏 찍어도 되니 잠시 기다리게"
재필은 신속한 몸놀림으로 태블릿으로 변한 스마트폰의 활성화 버튼을 다시 눌러 축소시킨다. 그리고 명석이 펼친 페이지를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겨둔다.
"회장님, 혹시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마무리지어도 될까요?"
명석은 잠시 생각하더니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 아내될 사람과 새롭게 만난 그 날, 카페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비가 엄청 쏟아지고 있었다네. 둘은 공교롭게도 비 소식을 못들어서 우산을 안가져왔고. 나는 입고 있는 외투를 벗고 위로 펼쳐서 비를 피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네. 그런데 아내는 어떻게든 뛰어서 집까지 빠른 속도로 가려고 하는 생각을 했는지 나한테 그렇게 말하더군. 그래서 나는 외투를 우산 겸 쓰고 뛰어가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네. 그때 나는 과학적으로 비를 덜 맞으려면 뛰는 게 낫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있다고 이성적인 척을 했더니 아내가 픽 웃더군"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아요"
재필은 잠시 고개를 들고 명석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인다.
"영화 같기는 하지만, 서로 비에 쫄딱 젖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네. 다음날 감기에 걸린 건 덤이고. 하긴 그녀의 집까지 달려가는 그 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이 환상적인 기분이었지"
명석은 다시 껄껄 웃고는 감상에 젖은 듯 잠시 멈춘다. 그리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나는 그 해 입시에서 S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하고, 그녀는 1년만 기다려줄 것을 부탁하더니, 공부를 열심히 해서 S대 약대에 입학했다네. 우리는 졸업할 때까지 쭉 캠퍼스 커플로 지내서 학교 안에서도 꽤 유명했었어. 매 학기마다 둘이 과 수석도 맡아서 하고, 남들이 보기 좋게 연애도 잘 했었지. 그리고 정혁준이라는 내 친구도 S대를 들어갈 줄 알았는데, 1년 더 공부하더니 미국 유학을 결심해서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 입학했어. 내 친구 정혁준도 아주 능력있는 친구라네"
와, 재필은 감탄을 거듭하면서 태블릿이 된 스마트폰으로 필기에 몰입한다. 재필은 다 마신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 놓더니, 마지막으로 명석을 보며 말한다.
"회장님, 혹시 마지막으로 오늘 아직 나누시지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명석은 턱을 쓸면서 말한다.
"내가 이호진 대표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군. 이제 그 선생도 대표 자리에 앉고 내가 잠깐 몸담았던 회사의 이사 직책을 맡은지도 십년도 더 지났으니, 여하튼 이제 내려놓을 때도 되었네… 이호진 대표는 원래 큰 회사에 대표나 이사 직책을 맡는 일에는 거리가 먼 사람일세. 천상 교육자인 사람이지. 그런데 어느 순간 주식에 손을 대더니, 미국 주식인 테슬라(Tesla)에 큰 자금을 투자했다네. 그러더니 테슬라라는 회사가 내가 발명한 '자율주행 노선 시스템'(automated driving route system)으로 인하여 큰 성공을 거두더니 주가가 급등했지. 그래서 몸 담은 회사에서 한 자리 차지하더군"
재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필기를 이어나갔다. 명석은 말했다.
"나도 이호진 대표에게 예전부터 빚을 진 것도 있고, 친밀한 관계를 이유로 한 자리 요구하길래 나도 따라주었지. 그런데, 이 대표의 경영 스타일이나 일하는 방식들이 아직도 나에게는 의문점이 남기는 하네"
재필은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그리고 다시 태블릿 크기가 된 스마트폰을 축소화시키고 명석을 바라본다. 명석에게 손을 깍듯이 내밀며 고개를 숙인다.
"그렇군요, 진 회장님. 지금까지 이야기 해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열심히 집필 작업에 헌신해보겠습니다"
명석은 껄껄 웃으며, 재필의 손을 덥썩 잡고 이야기한다.
"허허 힘이 닿는 만큼만 열심히 해보게. 내가 자네를 믿는다네"
재필은 카페를 나와서 명석이 차를 타고 출발하는 것을 배웅한다. 그리고 한숨을 돌리며 하늘을 바라본다. 재필은 눈부시고 아름다운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항상 같은 하늘은 없다. 다른 날마다 다른 하늘이 재필의 위를 덮고 있다. 그런 생각을 문득 하며 하천길을 따라 작업실인 집으로 향하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