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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의 하루 Feb 07. 2024

네 마리의 괴물

2023. 12. 26. 火

  몇 년 전부터 온라인상에 유행을 타고 번져나갔던 그림이 있다. 정확한 출처를 몰라서 글로 자세히 묘사할 수밖에 없지만, 어느 롤플레잉 게임의 검을 든 용사 같은 캐릭터가 일단 등장한다. 그 용사는 거대한 괴물을 하나 물리치는데 그 괴물의 이름이 그 위에 쓰여있다. 그 괴물은 '입시'라는 이름의 괴물이다. 용사는 안도하며 모두 해치운 건지 궁금해한다. 그런데, 그 뒤에 더 거대한 괴물 세 마리가 버티고 서 있다. '취업'과 '결혼' 그리고 '육아'라는 괴물들이다.


  마치 요즘 시대 청년의 인생을 세 컷으로 모두 축약해 놓은 것 같은 명쾌함에 감탄하면서 그 뒤로도 기억에 남아 나는 청장년기의 인생의 과제를 떠올리면 네 가지를 거의 자동적으로 연상하게 되었다. 나는 입시라는 괴물을 잡아서 처치하고, 취업이라는 괴물을 잡아서 안전하게 꽁꽁 묶어 생포해 놓았지만, 나머지 두 마리의 괴물들의 흉포함에 속수무책으로 고전하고 있다. 연애와 결혼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항상 고개를 숙이게 되는 나는 어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괴물들은 더욱 커 보였고, 내 마음은 쓰리다.


  한편, 민은 아직 네 마리의 괴물을 아직 해치우지 못하고 그대로 살려두고 있는, 마음이 조급한 청년이다. 그의 나이는 20대 후반으로 아직 앞날이 창창하고 못해본 것도 많은 나이이지만, 기왕 하는 입시를 남들보다 더 노력해서 나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올해도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시험에 낙방하게 되었다. 기숙학원에 등록하고 들어가서 1년 동안 연락도 끊고, 공부를 하더니 결국 올해 수능에서 꿈이었던 명문대에 떨어지고 다시 연락이 닿게 되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가 말하길, 저는 역시 포기하는 게 낫겠다, 이 나이에 무슨 재수냐고 하는 넋두리를 차량 맞게 했다. 그러나 나 그리고 나와 같이 동행한 준이형은 아니다, 그 시도만이라도 멋진 것이다, 1년 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본인 스스로가 잘 알 것이고, 그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작은 위로의 말에도 항상 경청하며 항상 고마워했고, 우리는 그런 그에게 격려와 필요하다고 생각한 조언의 말들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민은 틈만 나면 서울의 중위권 이상의 나름 괜찮은 대학교를 나온 우리들에게 부럽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형들은 좋은 대학 나와서 좋으시겠어요" 부러움 섞인 칭찬이 질투까지는 아닐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민이가 나와 준이형을 모두 좋아해서 일 것이고, 아직 민이에게는 기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 아직 없지만, 나중에 주어질 수 있는 것들을 인내심 있게 기다릴 줄 아는 민은 말한다. 자신에게는 계획이 다 있다고. 그에게는 내년에 수능을 보고 대학에 붙으면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었다. 보컬트레이닝, 몸만들기, 다이어트, 피부 관리, 소개팅 등등.. 하고 싶은 것도 참 많구나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게 하고 싶은 동시에 인생의 모든 것에 늦은 나이가 전혀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다. 수능을 준비하기엔 다소 늦은 나이이지만, 20대 후반은 아직 사회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나이라는 사실을.


  어른의 기준으로 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중위연령은 45.5세라는 사실과, 좋은 대학에 나오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할만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대기업을 들어가는 일은 녹록지 않은 일이며, 나이도 엄연한 스펙이라는 말도 했다. 내가 말한 것들이 그저 공중에 흩어지거나, 어린 꼰대의 조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도움이 되는 말이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예민한 민에게 마음의 여유를 찾고, 용기를 얻는 말들이었으면 한다. 누구보다 인내심이 있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민이 꿈을 이루고 하고 싶은 것들을 맘껏 할 날들을 소망한다. 나 역시도 민을 보며 감사해야 할 이유들을 하나둘씩 발견하게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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