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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rean in the usa Mar 18. 2024

플로리다 기행기

  


     플로리다로 떠나기로 한 건 재작년 가을이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풍선만큼 부풀어 길을 나서지 않고는 못 배길 지경이었다. 그때의 웨스트 버지니아는 단풍이 나날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 빨갛고 노란 잎사귀들이 들판 지천에 걸려 한 폭의 그림 같고, 신선하면서도 기분 좋은 바람에 실려오는 짙은 낙엽 냄새가 영혼을 풍족하게 한다. 푸른 하늘과 크림처럼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으면 세월이 흐른다는 것도 깜빡 잊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가을이 완연해진 것이다. 말간 공기와 투명한 강이 흐르는 곳에 살고 있다는 안도감마저 느껴진다. 그렇게 흐르는 몇 해의 가을은 더할 나위 없겠다는 마음으로 웨스트 버지니아에 폭 안겨 살았는데, 그 해 가을만큼은 포근하고 나른해지는 온갖 예쁜 것들, 추수하기 직전의 풍요로움 내음 같은 것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세월 가는 줄 몰라 좋았는데, 세월에 아예 묻혀 버릴까 싫증이 나는 이 고약한 마음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타고나길, 멀쩡하다가도 변덕을 부리는 내 심성이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웨스트 버지니아의 가을을 뒤로하고 떠나는 여행은 우리에게 제법 큰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산과 강이 흐르는 곳과 완전히 다른 곳일 것. 선선한 가을이 아닌 전혀 다른 계절일 것. 그렇게 고민하니 정답은 금방 나왔고 나는 일찌감치 가고 싶은 곳을 골라 놓았다. 1년 내내 여름의 태양이 부서지는 해변이 넘실거리는 곳, 플로리다였다.

나는 늘 얼마쯤은 바다와 맞닿은 경상도의 도시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파도가 햇빛에 부서져 반짝거리는 잔상이 늘 그리웠다. 야트막한 동산, 들판으로 둘러싸인 우리 동네를 떠나 해변의 모래밭을 걷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삭바삭한 감자칩 같은 여름의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좀 더 후덥지근하고 나른한 플로리다를 선택한 것은 해안가를 따라 길게 늘어진 많은 해변들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지인들의 추천도 있었거니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테마파크인 디즈니 월드도 꼭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왕 멀리 떠나는데 가 볼 수 있는 곳은 모두 가보고 싶다는 욕심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유난스럽게 일찍 짐을 싸며 떠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새벽부터 차를 타서 공항으로 달려 가 또다시 비행기를 탔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에 잠을 설친 탓에, 긴장이 풀리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정신없이 잤을까. 어느새 착륙을 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왔고, 비행기는 곧 올랜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올랜도는 플로리다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방문객도 가장 많은데 그건 바로 디즈니 월드와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와 보고 싶어 하는 테마파크가 2개씩이나 같은 도시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탔던 비행기만 해도 엄마랑 아빠랑 함께 탄 어린이 승객이 많았고, 올랜도 국제공항은 가족으로 보이는 여행객들이 와글와글 했다. 덩달아 나도 사람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웨스트 버지니아주를 벗어나 플로리다주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 것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달라지는 공기의 무게와 질감이었다. 선선하고 싸늘한, 가벼워서 산뜻하기까지 한 웨스트 버지니아의 공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더 단단하고 밀도 높으면서도 후끈한 플로리다의 공기가 훅 끼쳐왔다. 내가 찾아본 바로 우리가 떠난 11월 중순은 그렇게 덥지 않다고 했지만, 우리가 느끼기에 이곳은 여름이었다. 그 미지근하고 촉촉한 공기도 그러했지만, 온통 즐겁고 들뜬 얼굴의 사람들이 재잘거리며 어디론가 열심히 걸어가는 활기찬 모습들이야말로 여름휴가를 실감 나게 했다. 덩달아 들뜬 우리도 신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공항에서 렌터카를 픽업하고 디즈니 월드로 방향을 정했다. 사방에 산도 동산도 보이지 않는 풍경에 우리는 이상하게 속도를 내면서 숙소로 향했다.  

악어가 출몰하니 조심하라는 표지판을 세워 둔 우리의 숙소는 이국적인 리조트였고, 우리는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멀리 떠나왔음을 실감하며 짐을 풀었다. 보통 테마파크 안에 있는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묵으면 개장하기 전 30분 일찍 입장이 가능한 혜택을 주기 때문에 내일도 새벽 일찍 일어날 작정이었다. 완전히 곯아떨어졌다가 알람이 울리자 우리는 누가 깨울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디즈니 월드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Wow!”

디즈니 월드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멈춰 서서 감탄을 했었다. 이 거대하고도 인공적인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정말 독특한 것이었다. 나뭇잎 하나, 흐르는 작은 물줄기 하나도 그들의 동화 속 세상을 구현하는데 충실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조화로워서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우뚝 솟아있는 신데렐라의 성마저도, 이곳을 위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정말 중세시대의 어느 영주가 기거했다고 믿어도 좋을 만큼의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고, 마치 아주 오랫동안 여길 지켰다는 것 마냥 흘러간 세월감 마저 느껴졌다. 영화 속에 풍덩 빠져든 것 같은 느낌을 받도록 햇빛과 공기, 바람의 채도마저 조정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재 인류가 구현할 수 있는 시각적 예술과 기술을 극한으로 구현했다는 것은 누구나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스타워즈’의 황량한 사막 행성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걸작인 ’ 아바타‘에 등장하는 판도라 행성의 원시림을 그대로 구현해 놓은 광경을 보았을 땐 솔직히 말해 소름이 돋았다. 디즈니를 상징하는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와 정서를 다양한 연령과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인종들이 똑같이 공감하고 감동하는 것 역시 놀라운 일이었다. 첫날, 디즈니 월드 안에서 걷고 또 걸으며 나는 이 거대한 테마 파크가 하나의 완벽한 세상이란 생각을 하며 미국에서나 가능한 이 거대한 규모의 땅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술력, 전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자본을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영원히 머물러도 질리지 않을 것 같던 디즈니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싶어진 것은 내가 생각해도 사소한 것이었다. 디즈니 월드에는 각각 킹덤이라고 이름 붙인 4개의 구역이 있는데, 한 구역을 돌아보는데만 해도 꼬박 하루가 걸린다. 나는 막연하게 이렇게 규모가 거대한 테마파크라면 사람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쾌적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완전한 나의 오산이었다. 큰 규모만큼이나 엄청난 인파가 매일매일 입장했고 그 어마어마한 인파들은 어딜 가도 북새통을 이뤘다. 난 태어나서 그렇게 사람이 많은 것은 처음 볼 정도였다.  나와 남편은 서로를 놓칠까 봐 내내 팔짱을 꽉 끼고 다녀야만 했고, 모두들 타보고 싶어 하는 인기가 많은 어트렉션 같은 경우에는 적어도 2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했는데, 그런 시간 낭비를 피하고 싶으면 미리 탑승 시간을 예약해야 했다. 그마저도 만만치가 않아서 아침 이른 시간에 확인하지 않으면 금방 솔드 아웃이 되고 만다. 예약은 자기가 맡아서 하겠다며 큰 소리를 치던 남편은 느긋하고 태평한 그 답게 거의 모든 탑승 예약을 놓쳐 버렸고,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롤러코스터를 3시간 동안 기다리다가 우리 바로 앞 순서에서 기계 고장으로 운행을 중지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대책 없음을 자책하였다.

“여기서 3시간을 기다렸는데요?!”

남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직원들에게 항의를 했지만, 그들도 우리도 할 수 있는 게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휴가가 아니라 흡사 임무 수행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잎파리 하나도 완벽하게 디자인된 이 거대한 세계를 구경하는데 조금씩 김이 새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이렇게나 푸르고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이 가득한데 그 안에서 새살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새들조차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테마 파크에 와서 동물 타령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만, 나는 그들이 디자인하지 않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이 세계를 누비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사람이 창조해 낸 하나의 거대한 인공세상은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은 대단한 즐거움을 선사하면서도 마치 신기루처럼 영영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모래성처럼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기분을 들게 한다. 다시 오겠냐고 물으면 기꺼이 그러겠다고 대답하겠지만, 여전히 그런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 아름답고 마법 같은 디즈니 월드에서 충분히 구경할 만큼 구경했고, 즐거울 만큼 즐거웠다는 후련함이 밀려왔다.


  우리는 디즈니 월드에서 점심을 먹고 곧장 템파로 떠났다. 아름다운 해변가에 위치한 도시 템파는 휴양지로도 유명해서 우리는 꼭 햇빛이 이글거리는 해변에 누워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디즈니 월드의 정교한 인공미에 점점 흥미를 잃어 가고 있던 남편은 특히나 더 했다. 그런데 접촉 사고가 생긴 모양인지 차들이 꼼짝도 하지 않았고 주차장처럼 변해버린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는 그저 하릴없이 앉아 있는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젠 굵은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워낙 습도가 높은 지역이다 보니 지나가는 소나기 같은 게 아닐까 기대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후드득 쏟아지는 비는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우리는 지금 해변으로 가는 건데, 이렇게 비가 오면 어떻게 하지.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몇 시간을 지루하게 도로 위에서 보내고 겨우 숙소에 도착하자 장대비 같은 비가 쏟아지고 으슬으슬 춥기까지 했다. 올랜도는 분명한 여름이었는데 지금 템파는 야박하다 싶게 쌀쌀해서 위에 무언가 걸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디즈니 월드의 온갖 아름답기만 한 광경을 보다가 우중충한 하늘과 을씨년스러운 야자수, 그리고 우두두 떨어지는 빗방울 아래 우산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어쩐지 서글퍼졌다. 템파에 도착한 첫날엔 해변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숙소에 갇혀 별 다른 것도 못하고 몰려온 피로감을 이기지 못해 가만히 누워 있었다.

기대했던 그 다음 날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구름이 껴 하늘은 흐리고 공기는 여전히 싸늘했다. 우리의 숙소는 클리어 워터 비치(Clearwater beach)근처에 있었는데, 평소엔 물이 맑고 고운 모래사장이 아름다워 물놀이를 하거나 태닝을 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우리가 피크닉 매트를 들고 갔을 땐 한적하기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흐린 날씨 정도는 문제가 되질 않지만, 바람이 쌀쌀하니 나와서 물놀이는커녕 모래사장 위에 서 있는 것도 내키지 않은 탓이었다. 우리는 먼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왔으니 한적하다 못해 썰렁한 해변가를 그래도 억지로 걸어 보았다.  

“왜 이름이 클리어워터 비치인 거야? 전혀 투명하지 않은데?”

오들오들 떨며 바닷바람을 맞다가 더 이상 참지 못했던 나는 불평을 해댔다. 남편은 템파에서 제일 유명한 해변이라고 했는데, 하며 자기가 죄를 진 것 마냥 우물거렸다. 숙소로 돌아오자 나는 콧물이 쏟아졌다. 뜨거운 태양과 반짝이는 파도는커녕, 템파에서 나를 맞이해 준 것은 감기였다.

나는 잔뜩 심술이 났다. 디즈니 월드에선 사람한테 치이고 템파에 왔더니 날씨에 치이는 꼴이라니. 적어도 해변에 오면 디즈니 월드에서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운 자연 그 자체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회색빛의 하늘과 우울한 색깔의 파도, 텅 빈 해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총 3일을 템파에 있었는데 마지막까지 태양은 영영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우중충한 해변에서 할 일이 없었던 우리는 근처 바에 가서 잔뜩 술을 먹고 알딸딸해진 기분으로 숙소에 돌아와 잠을 청하는 말곤 할 것이 없었다.


“일어나 봐.”

지끈거리는 두통과 무거운 몸을 일으키기 싫어서 못 들은 체하고 있었으나 남편은 연신 나를 흔들어 깨워댔다. 늦잠을 잤다는 것쯤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마지막날까지 해변을 즐기지 못했다는 실망감과 허무함에 전날 밤에 나는 좀 더 과음을 했었기 때문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저 만사가 귀찮았다.

“일어나서 밖에 좀 봐.”

남편이 다시 나를 깨웠다. 그냥 숙소에서 뭉개다가 체크아웃하면 늦은 점심이나 먹고 공항으로 떠날 요량이었는데 자꾸만 깨워대는 그의 극성이 못마땅했지만, 더는 모른 체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눈을 떴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뜻밖의 광경이 보였다. 창문 밖으로 햇빛 한 줄기가 방 안으로 쏟아졌다. 아, 드디어 구름이 걷히고 맑은 날씨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숙취도 잊고 후다닥 창문으로 가까이 갔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야자수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가 느껴졌다. 믿을 수 없이 상쾌한 온기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기운이 빠졌다. 벌써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체크 아웃은 넉넉하게 12시였고, 우리는 오늘 밤 웨스트 버지니아로 돌아갈 비행기를 타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편은 그 답지 않게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짐을 챙기랴 옷을 입으랴 정신이 없었고 활력마저 넘쳐 보였다. 멍하게 쳐다보는 나를 보며 그는 또다시 나를 채근했다.

“얼른 옷 입어. 그동안 못 했던 거 오늘 다 하고 가자.”


  

  햇빛으로 눈을 부시는 좁다랗고 하얀 인도를 걷다가 즉흥적으로 야생 돌고래 투어를 하는 작은 보트에 덜컥 올라탔다. 수족관에 갇히지 않은,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돌고래들을 만나러 바다로 나간다는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들을 유인하는 모든 것, 심지어 먹이조차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템파의 긴 해안가를 하릴없이 돌아다녀야만 하는 투어였고, 그저 하릴없이 템파의 긴 해안가를 따라 돌아다니며 혹시나 돌고래의 꼬리지느러미가 보이지 않을까 여기저기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내키지 않을 법도 했지만 흐리고 쌀쌀한 날씨 탓에 템파의 바다를 제대로 보지 못한 우리는 이렇게 보트를 타고 아름다운 해변을 멀리서 볼 수 있다는 건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다.

“저기 있어요!”

한 시간쯤 훌쩍 지났을까. 누군가가 다급한 외쳤다. 모두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우르르 몰려갔다.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물살을 가르는 파도 사이로 조그만 돌고래가 언뜻 비친다. 아, 그건 정말 돌고래였다.

보트는 순식간에 흥분으로 달아 올라서 뛰뛰거리는 흥겨운 음악을 틀며 우리 보트의 선장님은 최고 속도를 올렸다. 보트가 만드는 파도를 타고 돌고래가 수면 위로 경쾌하게 뛰어오르다가, 곧바로 다른 돌고래가 합류했다.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 가볍게 솟구쳐 올랐다. 넓은 바다를 누비는 야생 돌고래 들였다. 아직 다 자란 성체가 아닐지도 모를 작은 돌고래들이 보트와 경쟁하듯 파도를 타고 노는 소중한 광경을 목격한 나는 눈물이 팽 돌았다. 오로지 자기 의지로 야생에서 살아가는 생명체가 스스로 선택하여 인간들에게 모습을 보여주는 특별한 순간에 대한 감동이었다. 온통 파도뿐인 바다 위의 보트와 튀어 오르는 작은 돌고래 두 마리뿐인 순간이었으나, 디즈니 월드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감정들이 나를 비롯한 모두를 사로잡았다. 살아있는 자연이란 그런 것이었다.


  

  따뜻해진 날씨 덕분에 우리는 야외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쨍쨍한 태양 아래 근사한 해산물 요리와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들이키며 한가로운 오후도 즐겼다. 클리어 워터 비치는 이제야 그 이름답게 반짝거리며 일렁였고, 플로리다는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얼굴을 슬쩍 보여주는 것 같았다.

“여행 내내 흐리고 비가 와서 아무것도 못 했어요.”

우리 테이블의 서버에게 남편은 그렇게 하소연했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을 한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키가 큰 중년 남자였는데, 플로리다 템파가 자신의 고향이라고 소개했다. 남편의 말을 듣고 그는 심각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으며 오늘이라도 시간이 된다면 꼭 해변에 들리라고 권유를 했다.

“저라면 클리어 워터 비치 아니라, 인디언 락스 비치를 가겠어요. 난 거기서 해가 질 때쯤 아내에게 프러포즈했거든요. “  

그의 말에 우리는 당장 인디언 락스 비치(Indian rocks beach)로 차를 몰았다. 시간이 아슬아슬할 것 같았지만 저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가 프러포즈를 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석양의 해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무로 만든 긴 다리를 따라 얼른 백사장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이미 돌고래를 찾아 헤매느라, 먹고 마시느라고 늦은 오후 무렵이 되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마음이 다급해져 있었다.

개와 함께 여유롭게 해변을 산책하는 사람, 짧은 팬츠만 입고 조깅을 하는 사람, 다정하게 선배드에 누워 서로 의지하는 노부부들을 지나쳐 길게 늘어진 인디언 락스 비치의 모래사장에 들어서자마자 마법처럼 태양이 바다 아래로 서서히 잠기기 시작했다.

아, 그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길게 늘어선 해변가의 모래사장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넘실거리는 바다의 수평선도 끝이 없었다. 인디언 락스 비치의 석양은 하늘을 천국처럼 물들이고 붉은 노을은 서서히 옅은 오렌지색이 되었다가 살구색이 되었다가 라벤더색이 되기도 했다. 하늘과 맞닿은 파도도,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도 거울처럼 투명하게 하늘을 비추어 덩달아 물들었다. 그것보다 더 멋졌던 순간은 이처럼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석양 아래서 사람들은 그저 평화롭게 바라보고 산책을 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정리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이 눈부신 석양의 해변은 관광지로 붐비는 명소가 아니라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소중한 아지트였던 것이다. 이 순간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조각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늘 가슴속에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아름다운 석양의 하늘과 바스락거리는 모래의 감각을 잊지 않을 것이다. 불평불만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아무렴 어때. 플로리다 여행은 영원히 행복하게 기억될 것이다.


  웨스트 버지니아의 우리 집 창문 밖으로 보이는 들판들이 바람에 따라 춤을 춘다. 플로리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나는 봄이 온 들판을 보며 쏴아아 하고 흔들리는 소리가 파도 소리와 닮았다는 생각을 버릇처럼 한다. 그리고 웨스트 버지니아와 플로리다가 서로 얼마나 다른지, 디즈니 월드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생각하면 웃음마저 나오려고 한다. 우리에게 자뭇 심각한 얼굴로 인디언 락스 비치에 가보라던 그 남자의 얼굴도 스쳐 지나가고, 그러면 플로리다의 인디언 락스 비치가 떠오른다. 타는 듯한 붉은 석양과 유리처럼 투명한 바다가 마침내 떠오르면 나는 한참이고 그 생각에 머무른다. 어릴 때엔 여행이란 그저 좋고 멋진 풍경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 좀 더 어른이 되어 보니 여행이란 내 인생에 특별하게 반짝거리는 기억 하나를 얻으러 가는 것 같다고 여겨진다. 민숭맨숭하다가 그런 기억이 떠오르면 잠시 멈춰서 천천히 그날에 있었던 일과 사람들, 그 광경의 추억이 하나 둘 생각나고, 그런 기억들은잊혀지지도 않는다. 여전히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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