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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rean in the usa Mar 10. 2024

봄의 야생화



    이곳 웨스트 버지니아의 봄이 오는 소리는 톡 하고 터지는 꽃내음으로 알아챈다.

따뜻한 공기가 온종일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창문을 열어 두면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산이 많고 강이 흐르는 곳이라 그런지 몰라도 해마다 찾아오는 계절의 기운이 한국의 것과 무척 닮아 있다. 매섭게 추웠다가 언제 그랬냐듯 슬그머니 공기가 따뜻해진다. 꽁꽁 어는 바람에 외투를 여미고 눈만 내놓고 다니다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외출을 나설 때 등 뒤로 불어오는 따뜻한 미풍은 마치 겨우 내내 속죄를 하고 세상으로 나선 수도자가 된 느낌이다. 내가 겨울 동안 그만큼 대단하게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돌변하는 봄기운이 꼭 속죄를 하고 용서받은 것처럼 잔잔하고 평화롭기 때문이다.

산 아래 동네는 봄도 여름도 일찍 찾아오고 온화하지만 산속 깊이 들어갈수록 시간도 계절도 더디게 가는 것이 꼭 닮아 이곳의 기후는 우리나라의 강원도와 대체로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아마 지형이 서로 비슷한 면모가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혼자서 추측해 본다. 내가 사는 곳은 야트막한 동산에 앞 뒤로 버티고 있어서 바람이 조금 덜 야멸차고 훈훈한 온기가 하루 내내 제법 오래가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에는 봄이 오면 온 들판으로 동산으로 수채화 물감이 번진 것 마냥 온 색깔의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클라우드 모네의 그 유명한 정원처럼 흐드러진 들꽃들의 형형색색 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하고, 나도 한 송이의 꽃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하는 실없는 생각마저 든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땐, 자연과 나의 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큰 도시로 가려면 얼마나 차를 몰고 나가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조금만 차를 타고 나가도 숲이 있고, 들이 있고, 강이 흐르는 자연이 지천이라는 것이 낯설어서 영 가까이하지 않다가, 이윽고 봄이 오자 온 세상이 깨어난 것처럼 변하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내가 어떤 곳에 살고 있는지 조금씩 실감했다. 그 풍경은 어쩌면 감동적이기까지 할 정도여서, 가끔 길 잃은 사슴이 들판을 벗어났다가 다시 길을 찾느라 어슬렁거려도 도로 위엔 지나가는 차도 없이 한산하고 평화로웠다. 아마 내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면, 두 손 가득 화구들을 잔뜩 챙겨 들고나가 온종일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느긋한 봄바람이었다.  

바깥출입에 재미를 붙으면서 나는 또 다른 취미가 생겼다. 흙은 흙이고 그 위에 자라는 건 풀, 피어나는 건 꽃이지 특별할 것이 있느냐며 무심하게 다니던 나에게 그저 들꽃, 잡초이던 것들이 자꾸만 눈에 밟히고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식물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가뜩이나 그런 것은 전혀 모르고 살며 그저 들꽃, 잡초로만 여기고 살다가 그 속속들이 귀엽고 예쁜 모양 하나하나를 발견하면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애써 겨우 내내 웅크리다가 따뜻한 봄을 맞아 활짝 피어난 이 생명들에게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사과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이 기특한 것들에게 이름이라도 불러주어서 내년에도, 그 내년에도 고이 피어났으면 싶었다. 나는 웨스트 버지니아에 피어나는 봄의 야생화들을 그렇게 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푸른 바다와 닮은 코발트블루를 좋아하는 내가 보자마자 마음을 뺏긴 푸른색의 '미국제비꽃'은 처음으로 이름을 알고 싶어 찾아본 야생화였다. 어느 날 걷고 있는데 불쑥 나타나 그 앞에 처음으로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들여다보게 만든 꽃이었다. 가까이서 보면 푸른색에 은은한 보랏빛이 섞여 꼭 이대로 만들어 보라고 해도 엄두가 안 날 만큼 아름다운 색깔의 꽃잎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푸르면서도 옅은 보라색에 완전히 마음을 뺏겨서 한참이나 바라보면서도 어딘가 내가 아는 우리 제비꽃과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그 이름도 신기하게 common blue violet, ‘미국 제비꽃’이었던 것이다.

커다란 초록색의 잎사귀 위에 피어난 깨끗한 보라색 꽃송이는 서로 단정하게 어울려서 꼭 잘 차려입은 한복 맵시처럼 담백한 모양새이다. 아무리 한국의 제비꽃과 닮았다곤 하지만 왜 이렇게 익숙하다 못해 한국적이라고 느껴질까 의아했는데, 광복 직후에 우리나라에 귀화한 외래종이기도 해서 우리 식으로는 ‘종지나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자 웃음이 나려고 했다. 어째서 이름을 종지 나물로 붙여 줬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제비꽃도 그러하지만 미국제비꽃의 꽃잎은 정말 꼭 간장을 담는 종지처럼 조그맣고 귀여운 그릇 모양과 꼭 닮아 있다. 나라도 그런 이름을 붙여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 미국제비꽃을 보면, 혼자 마음속으로 종지 나물이라고 불러 본다. 그게 원래 이름인 것 마냥 꼭 들어맞는다. 가만히 종지 나물, 이라고 불러보면 한국땅을 밟고 있는 것처럼 편안해진다.  


 어릴 적 학교 다니던 길에 피어나던 계란꽃과 닮은 'early saxifrage'라는 야생화도 4월에 접어들면 여기저기 그 귀여운 얼굴을 보여준다. 흔하게 피는 야생화 중 하나여서 취급은 정말이지 잡초 정도로 여겨지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 단순하고 평범한 모양이 좋다. 아이들에게 꽃 모양을 그려보라고 하면 얼른 그려내는 동그라미에 꽃잎이 오밀조밀 붙어 있는 바로 그 평범한 꽃모양 그대로 부끄럼도 없이 피어난다. 이 꽃에도 혹시 다른 이름이 더 없을까 싶어 찾아보았지만, 다년초 야생화라는 이름 말고는 딱히 붙여진 이름이 없는 모양이었다.  'early saxifrage'라는 이름을 풀이해 보자면 '이른 봄 야생화'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부슬부슬한 털 같은 것이 가득 난 줄기를 따라 하얗고 조그마한 꽃송이들이 꽃다발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고, 향기도 은은하게 좋아서 이 하얀 야생화 꽃송이들을 따로 떼어보면 웨딩 부케처럼 우아한 면이 있다. 건조하거나 습해도 탈없이 잘 자라고 들이며 산이며 흔하게 나는 꽃이라 그냥 지나치고 마는 꽃이기도 하지만 그 앞에 앉아 그 작은 꽃잎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단순한 것의 미학처럼 과하지 않으면서 단정한 실루엣의 하얀 꽃망울들이 만들어내는 순수함이 결혼식에 꼭 어울리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에 잘 어울리는 말간 신부가 결혼식을 치르려고 치장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순결하게 하얗고 작은 야생화에게서 화사한 생명력과 풋풋한 설렘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감상적인 것으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 엄마에게도 이 꽃을 보여 줬더니 그 정도는 아니라며 내 편을 들어주진 않았지만, 내 눈엔 엔 꼭 그런 걸 어쩌겠나. 하는 수 없다.  


  Dutchman's-breeches, '네덜란드인의 반바지꽃'은 보통 숲 속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야생화이다. 내가 이 꽃을 처음 본 것도 캠핑을 하러 갔던 날이었는데 마치 요술을 부린 것처럼 홀연히 피어나 있었다.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방울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요정 같은 모습을 한 꽃을 보자마자 대체 무슨 꽃인지 너무 알고 싶었다. 종종거리는 듯 매달린 꽃송이를 보며 혹시 은방울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꽃의 이름은 조금 황당할 정도로 직설적인 것이었다. 말 그대로 Dutchman's-breeches, 네덜란드인의 반바지 모양을 한 꽃이라는 뜻이다. 대체 뭐가 반바지처럼 생겼다는 건지 이해가 안돼서 가만히 보고 있자니 금세 이해가 되었다. 모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을 그대로 뒤집어 보면 꼭 반바지 모양이었던 것이다.

옅은 분홍색을 띠는 줄기가 조금 휘어지며 대롱대롱 매달리듯 피어난 꽃들을 보면, 사실 반바지처럼 보인다기보다는 오히려 좀 더 동화적인 느낌이 드는 꽃이다. 그냥 피어난 게 아니라 어딘가 마법을 부려서 피어난 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모양이 섬세하고 예쁘다. 모르긴 몰라도 꽃의 요정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이 이런 것들을 보고 쓰인 게 아닐까. 조금 그늘지면서도 습한 곳에서 잘 피어나고 3~4월쯤 되면 피어나는 꽃이니 봄이 찾아오면 금방 볼 수 있는 봄맞이 꽃인 셈이다. 숲 속에서 피고 자그마한 꽃이라 눈에 잘 띄지도 않는데 우연히 나무 아래서 이런 신비한 모습으로 피어난 꽃을 발견했다고 상상해 보면, 그게 나였더라도 이 꽃이 마냥 예사롭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귀여운 모양새를 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 못 배길 것이다. 어디서 네덜란드인의 반바지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이 꽃의 이름을 붙여줄 때 그 사람이 네덜란드 사람이었겠거니 한다.

어딘가 정원에서 정성 들여 키우는 꽃처럼 연약해 보이기도 하는데 이 꽃은 그저 피어난 그대로 놔두는 것이 상책이다. 사람이 손을 대고 꽃병에 담아두려고 꺾는 순간 다른 꽃들과는 달리 바로 시들어버린다. 자연에서 피고 자연에서 자라서 이 자리를 지키겠다는 맹세라도 한 것처럼 놀라울 만큼 금방 생명력을 잃어버려서 그저 멀리서 지켜보아야 하는, 다른 야생화처럼 수수하다기 보단 좀 더 신비롭게 느껴지는 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인지 마주쳤을 때의 반가움과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내가 봄에 피는 야생화들을 좋아하고 늘 알아보길 바라는 이유는 잘 모르긴 해도, 그것에 끝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늘 같은 온도와 습도를 맞춰 늘 푸르게 가꾸려고 애지중지하는 우리 집 화분들을 돌보며 나는 언제나 끝없이 싱싱하길 바란다. 조금이라도 시들해지면 온갖 좋다는 것을 다 퍼부어야 직성에 풀린다. 생명이 끝나는 순간이 무엇보다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봄에 피는 야생화들은 온 들판으로 산으로, 나무 밑이든 현관 아래든 누구네 잔디밭이든 가리지 않고 피어나 타고난 대로 만개하고 여름이 오면 사라진다. 정원에서 피는 아름다운 장미, 튤립, 프리지어 같은 꽃들과 비교하자면 한없이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대부분 작고 나지막해서 보통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문간이나 마당에 나면 뿌리째 뽑히기 십상이다. 그래도 그 연약한 꽃송이들은 다음 해 봄이 찾아와 느긋한 봄바람을 타고 다시 슬그머니 피어난다. 그건 나에게 순리처럼 보인다. 그 건 피고 지는 때가 반드시 정해진 자연의 흐름이다. 누구보다 더 겸허하게 순응하여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낙화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래서 영원히 지지 않는 작은 생명들을 매년 보고 있으면 이 먼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살아보려 애를 쓰는 나에게도 어떤 순리가 있어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헤아려 본다.

올 3월도 반가운 손님처럼 어느덧 우리 마당까지 들어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온 세상을 물들이려고 한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야생화들도 제각각 웅크렸던 곳에서 조심히 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순리대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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