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심란함을 감추기 힘든 나날이었다. 아끼는 화분의 나뭇잎이 시들해진 것을 발견한 건 작년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난 뒤였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도 싱그러운 초록의 잎사귀들은 나의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올 겨울엔 무슨 일인지 그렇게 싱싱하던 잎들이 축 쳐지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누렇게 물들어 가기까지 하자 나는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굴렀다. 혹시나 물이 고여 있나 배수 그릇을 살폈다가, 영양제를 사다가 뿌려주기도 하고, 습도를 낮춰도 보고 올려도 보고,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보라고 하루 종일 부산을 떨며 화분의 위치도 바꿔 주었지만 영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겨우 배꼽까지나 오던 것을 어깨가 넘도록 훌쩍 키워 낸 그 화분은 나의 자랑거리였는데 시들시들 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힘없는 이파리처럼 노랗게 물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어쩔 수가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국과 먼 미국에 와서 살다 보면 많은 것들이 그러하다. 요즘엔 휴대폰 하나로 못 하는 것도 없고, 못 구하는 것도 없으니 한국과 관련된 것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에 사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큰 도시에 사는 남들보다는 좀 더 수고스럽다. 하지만 제일 괴로운 건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따라잡을 길이 없는 세월의 흐름이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국에서 사는 탓에 나에겐 만남과 이별이 유독 잦다. 비행기에서 내려 인천공항으로 들어올 때는 말로 다 못할 만큼 설레고 기뻐서 그리운 식구들 얼굴, 친구들 얼굴이 얼른 보고 싶어 서두르는데, 다시 돌아갈 때가 되어 다시 오겠노라고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 펑펑 쏟는 눈물은 무뎌지지도 않고 늘 가슴이 아리다. 보고 싶었던 이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때도 문득 그런 마음이 든다. 그리웠던 얼굴들이 내 기억과는 조금씩 달라져가고 있음을 깨달을 때 실감하는 나의 부재는 어쩜 그리 씁쓸하게만 느껴지는지 도무지 옅어지는 법이 없다.
설을 맞아 잔뜩 부푼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북적거리는 공항과 연착을 견디고 마침내 도착한 한국은 웨스트 버지니아 보다 따뜻했다. 내 기억으로 이맘때쯤이면 한참 추워질 때인데 오히려 포근하다 싶었다.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원 없이 먹으면서 빈둥거리는 명절은 정말이지 달콤했다. 나는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온갖 전들을 부쳐냈다. 미국 집에서도 추수감사절보단 추석이나 설에 더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내는 데 익숙한 나는 물 만난 고기였다. 그렇게 온 식구들이 명절 분위기를 톡톡히 누리고 연휴가 다 지나간 무렵에 백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부고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아빠가 육 남매 중 늦둥이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에 큰 형님이었던 백부는 이미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지병도 없으셨을뿐더러 외출도 잦으신 정정한 분이셨다. 명절 안부를 드릴 때만 해도 건강하고 활기가 넘치던 어른이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빠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부고가 잘못 온 게 아니냐는 아빠의 목소리는 너무나 연약하게 들렸다.
장례식은 왁자지껄 했다. 웨스트 버지니아의 고요한 바람소리와 한적한 정적에 비하면 이 곳이 오히려 더 시끌시끌하고 활기가 넘친다고 느껴졌고, 사실 이 모든 의식들은 죽은 이를 위한 것이라기 보단 여전히 살아 있는 이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고 미국댁까지 왔네!"
큰 형님이 기가 막히게 자리를 만들었다며 둘째 숙부가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 장난기 넘치는 둘째 숙부는 내가 미국 남자와 결혼하자 그 뒤로 내 이름 대신 줄곧 미국댁이라고 불렀다.
영정 사진 속 백부의 얼굴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흐드러진 꽃들 사이에 놓인 그 얼굴을 보자 나는 그의 죽음이 실감 났다. 큰 병치레 없던 어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이유가 고작 낙상 때문이었다는 말을 듣자 아빠는 엎드려서 울었고 상주였던 사촌오빠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술잔을 서로 주고받으며 껄껄 웃는 웃음이 간간이 들리는 와중에 향을 피우고 함께 엎드려 절을 하고 흐느끼며 심연 같은 슬픔을 묵묵히 견디는 우리 식구들의 모습은 아주 한국적이면서도 서로의 존재로 인해큰 위로를 받는 정스러움 그 자체이다. 이 독특하면서도 깊은 정서는 나의 정체성이었다.
내 어린 시절 명절의 기억은 늘 시골 조부모님 댁의 마당에서 시작된다.
막내둥이인 아빠는 고향의 노부모가 우리 식구를 누구보다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것을 알고 있어서 늘 귀향을 서둘렀었고, 번거로웠을 엄마는 그래도 기꺼이 남편을 따라주었다. 나와 동생은 잔뜩 들떠서 온갖 장난감을 배낭에 넣고 소란을 떨면 엄마는 와르르 쏟아내고 딱 한 가지씩만 가져가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동요를 목청껏 따라 부르다가 차에서 내려 마구 달려가면 아이구 우리 똥강아지들 하며 할머니께서는 우리를 품에 폭 안으셨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진동을 하는 마당에서 실컷 노는 것이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어둑해지면 노는 것도 싫증이 나서 우리는 나무로 만든 평상에 올라가 앉았다. 그 쯤엔 친척들이 하나둘씩 마당 밖으로 난 좁은 길에 들어서는 것이 훤히 보였다.
백부는 늘 품이 조금 큰 양복차림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길이 없는 큰 보따리를 들고 성큼성큼 들어섰다. 곁에 선 백모는 한복 차림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도 그는 이미 노년에 이제 막 접어드려는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그것보다 더 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으니 나는 그걸 별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백부의 식구들이 도착하면 상다리가 부러지게 맛있는 음식들로 저녁상이 차려지는 것이라 배고픈 나와 동생은 늘 마당 밖을 내다보며 휘적휘적 걸어오는 백부의 모습이 혹시 나타나진 않을까 빼꼼히 쳐다보곤 했다. 백부네 식구들이 우리 식구들에게 늘 잘했다곤 할 수 없고 어린아이들은 모르는 어른들만의 사연도 분명 있겠으나, 백부는 평상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늘 이놈의 손들, 하면서 볼을 쓰다듬어 주셨었다.
늦둥이 막내아들인 아빠의 후광, 온 마을사람들이 인물 곱다며 칭찬하던 새댁인 엄마, 집안의 유일한 꼬마 손주들인 우리들까지 합세하여 우리 식구들이라면 그저 집안의 막내둥이들로 어화둥둥 해주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였으나, 백부에겐 전혀 달랐다. 특히 할아버지와 백부는 꼭 한쌍의 콤비 같았는데 두 사람은 똑 닮은 얼굴들을 하고선 늘 무언가를 의논했었다. 우리 아빠는 보기만 해도 짠하고 애가 타는 막내 놈이었다면, 백부는 젊은 시절 얻은 맏아들로서 의지가 되는 동지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딘가 학자 같은 모습을 한 백부의 모습도 한몫했으리라. 아닌 게 아니라 그 어르신은 집안에서 제일 똑똑한 분이셨다. 집안의 장손인 그는 모르는 시절이 없어 고모들의 학창 시절 연애사건은 물론이고 아빠의 코흘리개 시절에 응석쟁이로 할머니 속을 시커멓게 태우던 일까지 척척 꿰고 있었다. 아빠는 할아버지보다 백부를 더 어려워했으니 나와 동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다음으로 큰 어른을 잃은 우리가 이토록 큰 상실감에 시달리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온 식구들의 세월과 굴곡의 최후의 증인이었으며 식구들의 시간을 거름 삼아 자라난 커다란 고목이었다. 그런 어르신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온 식구들은 제각각 추억의 크고 작은 파편들을 잃고 말았다. 백부는 이젠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던 그 따뜻한 시간들의 파수꾼이었으니까.
미국행 비행기를 다시 타러 공항으로 가는 길에도 나는 조금쯤 멍했다. 도무지 어딘가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꼭 한바탕 꿈을 꾼 것처럼, 우리 집에서 식구들과 지내다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났다가 아주 긴 여행을 마친 것 같은 피곤함이었다. 막상 다녀오고 나면 추억도 기억도 없이 그저 다녀왔다는 사실만 기억하는 그런 여행처럼, 이번 한국행이 꼭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생전에 너를 다시 보는 일이 있겠냐는 어느새 여든이 훌쩍 넘은 고모의 말이 잊히지가 않았다. 시골 조부모님 댁에서 늘 맡았던 흙냄새, 어릴 적 아파트 놀이터에서 실컷 놀고 나면 손에서 나던 철냄새, 씽씽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던 내 방, 할아버지가 조금씩 꺼내주시던 사랑방 알사탕, 누구 똥강아지냐며 얼굴을 비비던 할머니의 품,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던 엄마의 어깨와 엄마를 다독이며 멀어지는 아빠의 뒷모습. 내가 잊고 있던 시간의 부재들과 앞으로 피할 수 없을 공백들. 백부를 잃고 나서 나는 고향에 두고 온 것이 무엇인지를 드디어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내 일부분을 영원히 한국에 남기고 왔다. 그리고 그 일부분을 평생 그리워할 것이다. 그 건 내가 아무리 잘해주어도 변하지 않던 노란 이파리처럼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캄캄해진 비행기 안에서 나는 펑펑 울었다.
캐리어를 끌고 현관문 열쇠를 돌리기도 전에 남편이 벌컥 문을 열었다. 그는 도무지 한국행 일정을 맞출 수가 없어서 혼자 남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이미 한국에 가 있던 나로부터 백부의 부고를 들은 그는 갑자기 생긴 장례식 때문에 슬프고 바빴겠다며 내 짐을 받아 들었다. 축 쳐진 몸과 마음으로 거실에 들어서는데, 나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했다.
내가 애지중지하던 화분이 다시 싱그럽게 살아나 푸른 잎사귀를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발걸음이 느린 봄을 놀리는 것처럼 톡톡 터지는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놀란 마음에 다급하게 물었고 그는 그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 하는 그의 버릇 중 하나다. 어떻게 된 거냐고 귀찮게 졸졸 따라다니며 다그쳤더니 그가 마지못해 말해주었다.
"사실 아무것도 안 했어."
내가 애를 쓰며 화분을 돌보아도 도무지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자 그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반쯤은 포기였고, 반쯤은 이 정도 했으면 앞으론 네 몫이라는 마음도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노랗게 변한 이파리들은 조금 잘라 주었단다. 물도 주지 않고 영양제도 주는 법 없이 그냥 늘 있던 그 자리에 놔두었더니 새 잎이 막 자라나면서 다시 건강해지더라는 것이다.
"나무도 꽃도 한 번씩 그럴 때가 있어. 그냥 내버려 두면 자기들이 살 길을 찾아."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숲 속에서 자란 그의 말은 나에게 그럴듯하게 들렸다. 건강한 잎사귀들은 미용실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산뜻해 보이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아끼는 화분이 다시 싱그러움을 찾은 것은 나에게 부활처럼 느껴졌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무기력함과 더불어 상실감까지 안고 돌아온 나에게 보란 듯이 반짝이는 강한 생명력은 이상하게도 큰 용기를 주기까지 했다. 상실감과 허탈함, 슬픔을 충분히 겪고 난 뒤엔 다시 푸르게 만개할 것이라는 위로 비슷한 것.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뿌리가 흔들리는 이 기분과 자꾸만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철없는 마음은 향수병과 닮아 있다. 한 번 그러기 시작하면 나는 좀 지독하게 앓는 편인데 이번에도 역시 예사롭지는 않았다. 집안 식구들 모두가 자기 몫만큼 나눠 가진 슬픔까지 보태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법 겪어보았다고 이젠 퍼뜩 알아차린다. 나에게 향수병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고향의 기억을 잃었다는 섭섭함이다. 다시 돌려보려고 애써볼수록 달라진 세월에 새로운 씁쓸함이 더해진다는 걸 깨닫자 이젠 그렇게 발버둥 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상심해서 쓰라린 마음에도 물이니 영양제니 하는 온갖 정성을 퍼붓기보다는 그저 무심하게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 약일 때도 있다. 맥없이 고꾸라지는 마음이 새로 난 잎처럼 다시 힘차게 고개를 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늘 무심한 법이니까 애태우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것보다 네 살 길은 이제 네 몫이라며 그저 바라봐 주는 것이 어쩔 땐 좋은 방법이라는 것임을 나는 눈이 어두워 잘 몰랐다.
백부의 긴 세월은 끝을 맺었고 내 몫은 아직 남아 있다. 흘러간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갓난아이일 적부터 익힌 삶의 전제이다. 단순하고도 변하지 않는 그 진리를 생각하면 시원한 물 한 컵을 마신 것처럼 머릿속이 상쾌해진다. 그러면 슬픔에 파묻혀 멍하게 아무것도 못하는 것보단 먼 곳으로 훌쩍 떠난 백부의 평안함을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더 옳다는 기특한 마음까지 먹을 수 있다. 여기 멀리 떨어진 미국땅에서도 조금이나마 효험이 있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