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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rean in the usa Feb 18. 2024

이국의 말

            



         마이클 호프만 감독의 <One Fine Day>는 비가 내리는 어느 늦은 밤,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시작된다.  영화 속 미셸 파이퍼는 나의 첫 무비스타였다. 그녀의 세련된 에디튜드와 옷차림은 어린 얘가 보기에도 홀딱 반할 만큼 멋졌던 것이다. 영화 속 계절은 마침 선선한 가을의 뉴욕이다. 90년대의 낭만적인 뉴욕의 풍경 사이로 트렌치코트를 입은 근사한 미셸 파이퍼는 하루 종일 거리를 바쁘게 뛰어다닌다.

나는 그때 더빙으로 되지 않은 외국 영화는 처음으로 본 것이었는데, 한국말이 아닌 낯선 외국어는 아주 낭창하게 들렸고, 뉴요커이자 건축가를 연기하는 미셀 파이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똑 떨어지는 그녀의 영어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미국사람이 영어를 잘하는 건 우리가 한국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처럼 당연한 것인데도 나는 이국적인 그들의 모습과 도시의 풍경에 푹 빠졌던 모양이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멋있는 옷을 입고 영어도 술술 말할 줄 알아서 꼭 뉴욕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말 거야. 그게 내 꿈이 되었다. 장래희망을 쓰는 칸에는 허구한 날 쓰던 피아니스트를 지워 버리고 어디서 주워들은 커리어 우먼이란 걸 또박또박 자랑스럽게 썼다. 한껏 뽐내는 목소리로 친구들 앞에서 영어를 따라 한답시고 꼬부랑거리는 말을 내 멋대로 지어내기도 했을 정도로 난 영어가 잘하고 싶었다. 내가 어찌나 졸라댔던지 엄마는 얼마 있지 않아 영어 학습지를 신청해 주었다. 그렇게 영어가 내 인생에 슬그머니 들어왔다.

그러나 점점 커가며, 내가 얼마나 큰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가 깨닫게 되자 더 이상 영어를 술술 말할 줄 아는 뉴요커가 되겠다는 꿈을 꾸진 않게 되었다. 미국으로 떠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결심과 번거롭고 힘든 과정을 거쳐 비행기에 올랐었는지를 가늠이 될 만큼 철도 나고, 입시 공부를 하면서 영어는 진절머리 날 정도로 지긋지긋해졌던 것이다. 혼자서 훌쩍 뉴욕 여행을 다녀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영어와 나는 서서히 결별하여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영어는 내가 토론토로 떠나게 되면서 내 인생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더 이상 마냥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어린 나이도 아닌 데다가 회사까지 그만두고 캐나다로 떠나겠다는 나를 모두들 염려하고 생각을 바꿀 것을 권유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뜻을 굽히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배웠던 영어는 도로 아미타불이었다는 것을 절감하며 토론토에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애를 쓰자 가까스로 영어와 친해졌다. 그런데 그다음엔 설상가상으로 미국 남자를 만나 덜컥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영어는 그렇게 내 인생에 성공적으로 똬리를 틀었다.

한국말만큼이나 영어를 많이 해야 하는 일상이었지만 우린 계속 한국에서 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보기 좋기 빗나갔다. 남편이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면서 인생의 항로가 다시 바뀌었고 우리는 끝내 미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려니 뒤따라오는 이별들 때문에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들어 괴로웠지만, 한편으론 인생의 새로운 장 앞에서 들뜬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사 준비를 하느라 짐을 싸면서 무슨 바람인지 나는 다시 뉴욕에 가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가장 좋아하던 영화 속 공간은 가을의 뉴욕이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밟았던 미국땅도 다름 아닌 뉴욕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장 여행을 떠났다.

빌딩숲 사이로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조금만 걸으면 나타나는 멋진 카페들,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레스토랑과 귀여운 빈티지 가게 등을 하루종일 걸으면서 행복에 겨워서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 맞은편을 바라보면 허드슨강의 넘실거리는 물결 위로 맨해튼의 화려한 불빛들이 일렁여서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센트럴 파크의 잔디밭에 앉아 베이글과 커피를 꺼내놓고 있고, 괜히 챙겨 온 책을 꺼내 들고 따사로운 햇살을 한껏 즐기며 이마에 땀이 날 때까지 앉아 있기도 했다. 영화 속 한 장면으로 풍덩 빠진 것처럼 모든 것이 좋고 완벽했다.  

미국에 오길 정말 잘했어!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느 뉴욕의 빈티지 옷가게에서 내 몸에 딱 맞는 초록색 실크 원피스를 한 벌을 입고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확인하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양손 가득 쇼핑백과 캐리어를 들고 웨스트 버지니아의 우리 집 앞에 내렸을 때의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건 정말 고요한 정적이었다.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고 공기는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단풍으로 물든 언덕과 갈색의 들판뿐이었다. 늦가을 무렵이었기 때문에 앙상한 나무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웨스트 버지니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한적하고 황량하기까지 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에 홀린 나는 웨스트 버지니아의 고요한 정적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때 나는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가구들과 새로 산 살림들을 정리하느라 마음이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소중하게 포장해 온 예쁜 접시며 나이프며 포크 같은 디너 웨어를 정리해서 찬장에 넣고, 뉴욕에서 새로 산 그 초록색 드레스 한 벌도 옷장에 걸어두었다. 작은 나무 식탁 위에 꽃병을 올려두고 분홍색 튤립도 꽂았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들로 집안이 가득 차니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허니문이 끝나버린 것처럼 곧장 겨울이 찾아왔다. 살림 정리에도 시들해졌고, 하루가 길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장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뭐니 뭐니 해도 바깥 풍경이었다.

내가 살던 도시, 그보다 더 크고 화려한 빌딩숲의 뉴욕과 비교하면 웨스트 버지니아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이젠 창문을 열면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 눈이 오면 온통 하얀 언덕들 뿐이었다. 나는 고요한 겨울 속에서 갑자기 할 일을 잃은 사람이 되어 무기력해졌다. 늘 같은 풍경, 날씨는 하루 온종일 지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처럼 출퇴근을 하지 못하니 시간이 많아진 것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마음을 추스리기도 전에, 나에게 또 다른 어려움이 들이닥쳤다. 생각지도 않았던 영어가 발목을 잡았다.


  나는 일상생활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 그래서 남편과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고, 하고 싶은 말은 대체로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는 편이다. 캐나다에서도 혼자 잘 지냈었는데 미국에서도 당연히 잘 적응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별 문제는 없을 거라고 쉽게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 말을 잘하는 것과 말을 정확하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지내며 남편과는 늘 비슷한 패턴으로 말하게 되었고, 서로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어색하거나 잘못된 표현으로 말해도 남편은 찰떡같이 알아듣는 상황의 반복이었다. 게다가 그는 내가 엉망진창으로 말해도 결코 지적하지 않는 사람이다. 덕분에 나는 내 영어가 어딘가 점점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기분 나빠져서 나한테 말을 안 하면 어떻게 해? “

이상하게 말하면 고쳐달라고 이야기를 해도 남편은 자신의 신념을 고수했다. 누구에게도 지적을 받지 않는 나의 영어 회화가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눈에 훤했다. 그나마도 말하기 귀찮아질 땐 눈짓이나 손짓을 해도 무슨 뜻인지 귀신같이 알아듣는 사람과 늘 함께였으니 사실상 나와 그의 대화는 영어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닌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웨스트 버지니아에 도착하니 모두들 너무나 빠르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정도까진 그럭저럭 알아들을 만한데 생전 들어본 적 없는 그 억양들을 따라가기가 너무 벅찼다. 그건 꼭 남부 사투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은행에 부부 공용 계좌를 만들기 위해 전화를 걸었던 날의 일이다. 남편 말로는 원래 있던 계좌의 용도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전화로 요청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라고 했고, 또 미국으로 막 이사 온 우리에겐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별생각 없이 은행의 상담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How can I help you?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20분 넘게 기다리다가 겨우 연결된 통화였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을 듣자마자 나는 내가 얼마나 대책 없이 전화를 걸었는지 깨달았다.

상대편은 젊은 남성이었는데 사근사근한 목소리였으나, 문제는 그냥 듣기에도 금방 알아차릴 만큼 프랑스어 억양이 잔뜩 묻어나는 빠른 말투였다. 엑센트가 독특하고 알파벳에 따라 약간 다르게 발음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어서 나로서는 알아듣기 역부족이었다. 자신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는 걸 눈치챈 그가 같은 내용을 설명을 다시 설명해 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의식이 들자 등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저 남편의 말대로 전화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친절한 그는 또 한 번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고 필요하면 메모도 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불행히도 무엇을 메모해야 되는지 조차도 모르는 것이었다.

“Is there anything else I can help you with?(제가 더 도와드릴 건 없나요?)”

그가 경쾌하게 마지막으로 물어보았고, 당신의 말을 절반도 못 알아들었다는 참담한 소리를 차마 할 수가 없어서 나는 좋은 하루 되라며 전화를 끊었다.


  이런 일화는 그 뒤로도 수없이 많았다. 그래도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가면 나 혼자 주문을 하고 가끔 직원들과 농담 정도는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날도 그쯤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차를 몰고 나섰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 주차를 하고 가게 안까지 들어가기 귀찮아져서 차 안에서 주문을 해서 바로바로 받아갈 요량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내 차례가 되자 마이크가 켜지는 지지직 하는 소리가 났다.

“Are you ready to order?(주문하시겠어요?)”

이번엔 앳된 여성의 목소리였다. 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등학생 정도 밖엔 안되었겠다 싶었다. 목소리가 어린것도 그렇지만, 아주 빠르게 말하면서도 발음을 흘리는 특유의 말투가 십 대들의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속으로 난감해하고 있는데 스피커 너머로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듣자 하니 내가 이야기 한 메뉴 중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정확한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Sorry, 하며 내가 다시 묻자 스피커 속의 목소리는 다시 설명을 해주었는데 어찌나 빠른지 내가 알아들은 것은 고작 내가 원하는 건 지금 주문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를 붙잡고 3개의 선택지를 알려주었는데, 그녀가 알려준 그 세 가지를 내가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은 어림 잡아도 30분쯤은 되었을 것이다. 내 뒤로 차가 기차처럼 줄줄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나무가 사람보다 많은 이곳에서 그렇게 줄을 길게 선 건 대단한 거였다. 그 광경의 장본인이 된 나는 당황하여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Have a good one!(좋은 하루 보내세요!)"

창문을 열고 활짝 웃으며 직원이 건네주는 음식을 받고서 누가 나를 볼세라 허겁지겁 운전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정말로 울컥했던 건 12월의 끝자락이었다. 새해가 다가오자 나는 뉴욕에서 샀던 그 초록색 원피스를 꺼냈다.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 꼭 잘 맞고 멋져 보인 원피스였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얼른 사서 가지고 나왔는데, 빈티지 드레스라 살 땐 미처 몰랐던 얼룩이 보이는 것이었다. 실크로 된 옷감은 다루기가 어려워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물로 조금 지우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원피스의 초록색 실크 옷감에는 내가 뿌린 물 자국 그대로 얼룩덜룩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누로 조심스럽게 그 부분만 조물조물 빨아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얼룩은 점점 커지기만 했고, 반짝거리던 예쁜 초록색은 탁해져서 거무죽죽해졌다. 내내 아끼다가 특별한 날에만 입으려고 이제야 한 번 꺼낸 원피스를 영영 망치고 만 것이다. 큰 일 났다 싶어서 세탁소에 들고 가보았지만 이건 실크에 물자국에 난 것이라 얼룩을 빼기 힘들다는 이야기만 해줄 뿐이었다.

'내가 영어를 조금 더 잘했더라면 이 얼룩을 지워줬을까?'

미련한 생각을 하며 원피스를 들고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눈물이 핑 돌았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잖아. 미국에 괜히 왔다는 생각마저 슬그머니 들기 시작했다.


 한동안 나는 남편 뒤에 숨어서 바깥에선 최대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 시작했다.  내 영어 실력이 못마땅했고 혹시나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길 어색한 상황도 싫었다. 조용히 옆에 서서 남편이 알아서 처리를 하면 만족하는 식이었다. 처음엔 그럭저럭 너무 편하게 생각이 되었으나 곧 더 큰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남편 없이는 점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현실을 나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렇게 무기력한 내가 이 나라에 살아도 되는지 나 자신에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는 영어를 남편만큼 할 순 없을 것이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 마음에 상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당황스러운 순간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라는 건 정말 괴로웠다. 우스운 농담을 들어도 그것이 어떠한 문화적 맥락에서 왔는지 금방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며, 그렇기 때문에 남편과는 영원히 완전하게 소통하지는 못하리라.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좌절감에 흠뻑 빠져 마냥 시간만 흘러 보내던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세상이 좋아져서 이렇게 간단하게 미국에 전화를 할 수 있다며 엄마는 호호 웃었다. 잘 지내고 있느냐는 말에 우물거리며 별일 없다고 대답하고는 그동안 한국의 우리 집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국의 우리 집은 또 어떤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끊으려는 참에 엄마는 뜻밖의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뭐 할 건지 생각해 봤나?”

그 건 오래전부터 들어와 익숙한 엄마의 사투리 섞인 한 마디였을 뿐인데,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난 정말 여기에 뭐 하려고 온 걸까. 응당 생각했어야 할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순식간에 부끄러움은 홍수처럼 불어났다.

대답을 못하고 한참 동안 머뭇거리자 엄마는 우야든동 단디 해라(어찌 됐든 열심히 해라),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엄마와의 통화를 끊고 나서 한참이나 심란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자려고 누워도 엄마의 그 한 마디가 계속 나를 맴돌았다. 엄마도 알고 나도 안다. 이렇게 계속 있는 건 옳지 않다. 마음속 한 구석에서 누군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날 이후로는 나는 미셸 파이퍼가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생각이 왜 자꾸 그리로 튀는지 엉뚱하다 싶어 자꾸 떨쳐내려 해도 어떤 이미지 같은 것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전구가 탁 켜진 것처럼 번뜩 떠올렸다.

그건 내 오래전 우상이었던 <One Fine Day>의 멜라니였다. 영화 속에서 택시를 타고서 온통 헝클어진 머리와 화장을 정돈하면서도 막히는 쪽으론 가지 말라고 깐깐하게 말하던 바로 그 모습. 무례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굽히지도 않는 명료한 말투과 들으면 들을수록 새침한 개성이 잘 묻어나는 목소리를 제일 좋아했었다. 그러자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다고 학교 장래희망을 써서 냈던 어린 내가 덩달아 밀려왔다.


  나는 그때 커리어 우먼을 무엇이라고 생각했길래 그렇게 꼭 되고 싶다고 써냈을까. 지금의 나에게 그건 같은 의미일까. 짐작하건대, 그때 내가 원하던 그 모습은 뉴요커가 되어 바쁜 거리를 걷고 일하는 그런 삶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특정된 삶만을 바란다고 하기엔 그때의 나는 멋모르는 아이였다.

세월이 흘러 다 커버린 나에게도 그 의미는 그런 단편적인 삶은 결코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를 믿고 스스로 인생을 어떻게 살 지 결정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반짝거리는 높은 빌딩의 불빛들 속엔 내 집도, 내 인생도 있지 않다. 내가 어릴 적 동경하던 것은 열정적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는 한 사람의 강인 함이지 근사한 트렌치코트도, 멋진 뉴욕의 거리도 아니었다.

나는 당장 집 주변에 있는 ESL 스쿨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어학원이니 나에겐 안성맞춤이다. 문득 그렇게 정신이 차려졌다. 누군가 내 얼굴에 냉수 한 사발을 시원하게 뿌려준 느낌이었다. 그즘에, 청춘같이 산뜻한 여름이 찾아오고 있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사자성어는 곱씹을수록 인생과 닮아 있는 사자성어이다. 당장 나에게 이제 미국살이가 어떠냐고 묻는다면 꼭 새옹지마,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들만의 문화적 맥락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구멍이 숭숭 난 소설책을 보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한국인으로 나고 자란 나로서는 그 구멍을 모두 메우긴 아무래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여태껏 살아온 고향과는 전혀 다른 자연과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한적한 마을에서 나는 유년 시절보다 더 많은 다채로운 경험과 감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생각과 관점을 완전히 달리 하여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결핍을 존중하자 충만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겨울을 나고 나면 반드시 봄이 찾아오는 것도 그러하다. 모든 이치가 사실은 새옹지마 아닐까.

푸른 들판이 파도처럼 밀려오면 창문을 활짝 연다. 나는 도시에 살지 않아서 겪는 싱그러운 바람과 형형색색의 감정을 함께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서 이국의 말을 하기 때문에 나는 그 미묘한 경계선에 서서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을 돌아본다. 영어를 좀 더 잘하면 정말 좋겠지만, 그 대신 나에겐 이미 훌륭한 모국어가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언제나 서로의 끝을 잡고 우리의 인생을 오고 간다.

뜻대로 되지 않아 기분이 상하고 마음이 어수선할 땐 나는 새옹, 즉 변방에 살았다던 노인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집 나간 말이 암말과 함께 돌아와 가산이 늘었으나, 그 말에서 낙마를 한 아들이 불구가 되고, 불구가 되었기 때문에 아들이 전쟁터에 끌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던 인생의 굴곡을 모두 태연히 받아들였던 지혜로운 그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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