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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rean in the usa Mar 03. 2024

싸움과 화해

     


     사람이 사는 모습은 결국 홀로인 순간을 피할 수 없음을 늘 염두에 두려고 한다.

그 건 거창하거나 비극적이기만 할 필요는 없으나, 결국 우리는 스스로만의 개별적이고 온전한 존재라는 의미로 따지자면 꼭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 또는 사랑하는 가족이래도 결국 식당에선 서로 다른 음식을 맛보고 싶어 한다.

죽고 못 살 것 같던 연인들의 사랑도 세월이 지나면 그 형태를 조금씩 바꾸어 간다. 나에게 있어 사랑은 내 것이 아닌 것 같단 인상을 받는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살아 있어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는 유기체에 가깝다. 가지고 싶다 해서 반드시 오지 않으며 간신히 손에 잡아도 훌쩍 떠나버리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오래 머문 곳에선 그 색채를 바꾸어 가며 공유한 두 사람의 관계를 결국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나와 내 남편의 관계를 돌아보아도 처음과는 다른 모양이 되어 있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던 설렘과 미운 모습을 모르고 지나가는 맹목이 지나고 서로에게 익숙한 편안함과 평생의 친구가 된 신뢰가 어느새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사랑은 그 이의 단점을 곁눈질로만 보던 콩깍지 까지도 거두어 갔다.

나를 서운하게 해서 커지는 싸움보다 내가 이해할 수 없어서 생기는 싸움이 훨씬 많아졌다는 것이다. 우리도 여느 사람들이기에 싸우고 화해하며 실망하면서 그럼에도 다시 한번, 하고 슬그머니 마음을 푼다.


  모든 부부가 그러하듯이 우리 두 사람의 싸움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래도 따져보자면 보통 크게 두 가지의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바로 서로의 타고난 기질과 다른 문화적 배경이다. 물론 가장 잦은 원인이 되는 건 두 말할 것 없이 성격 차이이다.

남편은 알아주는 낙천주의자다. 매사 빨리빨리 해야 되는 경상도 특유의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나와는 정반대로 항상 느긋하다. 생글생글한 얼굴에 양보가 몸에 베여 있어서 그런 그를 두고 내가 언짢은 기색이라도 보이면 사람들은 대번에 나를 탓한다. 저렇게 긍정적이고 친절한 사람한테 화날 일이 무엇이 있냐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 식구들도 덮어놓고 그의 편을 드니 나로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는 건 나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장점은 곧 단점이기도 하다. 가끔 그는 지나칠 정도로 천하태평이고 느긋하다. 나는 그를 두고 꽃밭 속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길 좋아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입버릇은 “It will be alright (다 괜찮을 거야).”이다. 긍정적이고 밝은 태도야 물론 좋지만 비행기 놓치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 천천히 걸으면서 저런 말을 하는 그의 허술한 면모는 나를 예민하게 만든다.


  이미 고백했듯이 나는 늘 바쁘고 계획대로 착착 맞아떨어져야 만족하는 사람이다. 이 것 역시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나는 기억력이 좋고 한 번 하기로 한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 여행을 갔을 때 그는 내가 엑셀로 정리한 여행계획표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계획을 꼼꼼하게 짜느라 거의 분 간격으로 촘촘히 적어놨던 것이다. 이게 가능한 거냐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내가 좀 심했나 하는 생각이 슬쩍 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또 나는 정해진 동선대로 움직여야 직성이 풀린다. 발길 닿는 대로 가고 싶어 하는 그는 오로지 목적지만 보고 직진하느라 늘 저만치 앞서 걷는 나를 뒤쫓기 일쑤다. 그건 생활 습관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내일 꼭 해야 되는 일들의 순위를 정해 놓고 그것을 하루 중 어느 때에 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지를 따져보고 잠자리에 든다. 이렇다 보니 그가 나에게 가지는 불만도 내가 가진 것만큼이나 당연했다. 남편은 내가 지나치게 걱정을 해서 예민하게 굴 때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다가 신경쇠약에 걸릴지도 몰라. 소파에 반쯤 누워서 하는 그의 충고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지만 영 틀린 말은 아니다.

 

  문화적 차이는 의외로 큰 싸움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다 한 번씩 다툼이 일어나면 서로에게 제일 놀라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관점의 차이라고 하겠다. 한국이라는 고유한 문화권에서 자라나 온전한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나와, 온갖 문화가 섞인 이민국가에서 나고 자라서 전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구사하는 남편의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이가 만들어내는 갈등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쑥 나타나는데, 내가 기억하는 가장 최근의 일은 2022년도이다.

이 다툼은 정말 예상치 못했었다. 그 해 3월에 있었던 오스카 시상식이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이라고 하면 이미 짐작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리라.

그 해 여우조연상은 한국의 윤여정 배우가 수상해서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배우 윌 스미스(Will Smith)가 그 영광을 누리는 것보다 시상을 하러 나온 코미디언 크리스 락(Chris Rock)의 뺨을 때린 사건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단 당시 나는 윌 스미스 부부의 시끄러운 스캔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상태에서 생긴 다툼이라는 것을 미리 밝히겠다.

우리의 의견은 정 반대로 갈렸다. 물리적 폭행을 가한 윌 스미스의 잘못이 크다는 것은 둘 다 동의하는 것이었으나 자가면역 질병으로 인해 탈모가 온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Jada Pinkett Smith)에 대한 농담은 조롱에 가깝고, 윌 스미스가 그렇게 화내는 것도 이해한다는 것이 내 입장이었다. 크리스 락의 농담이 너무 심했으니 잘못이 없다곤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 남편은 완벽한 윌 스미스의 일방적인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는 원래 시니컬한 코미디언이고 자신의 일을 한 것뿐인데 기분이 나빴어도 그렇게까지 이성을 잃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 아내의 외모를 가지고 놀려도 같이 하하 웃어야 맞다는 거야?!”

나는 씩씩거리면서 그에게 따졌다.

“그가 그 농담이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는 있지.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사과를 요구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었어. 그가 무대에 올라가서 상대방을 폭행하는 건 가장 최악의 선택이야.”


  아닌 게 아니라 가만히 지켜보니 많은 여론들이 남편과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하며 윌 스미스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친한 친구 중에 나와 비슷하게 캐나다계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에서 가정을 꾸린 이가 있어서, 얼른 그녀에게도 의견을 물어보았다.

[우리 남편도 똑같은 소리를 하네.]

그녀가 보내온 문자 속엔 나와 비슷한 황당함이 잔뜩 묻어났다. 그녀의 남편은 침착하게 상황을 마무리 한 크리스 락의 직업의식이 대단하고 생중계가 되는 시상식에서 폭행도 모자라 욕설까지 한 윌 스미스의 행동이 무척 잘못되었다는 의견까지 덧붙였다. 알만큼 아는 사람이 왜 그런 자리에서 제일 나쁜 선택을 했냐는 것이다. 나는 갈 곳을 잃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모두들 동그라미라고 하는데 나만 세모로 보이는 기막힌 심정이랄까.

차갑다 싶을 만큼 냉정하게 들리는 남편의 의견이 다수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랬다고 그 정서를 이해를 해야 되는 건 미국에 살고 있는 나였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아내에 대한 심한 농담에 더 큰 거부감을 느끼는 건 나와 내 친구가 가지고 있는 한국적인 정서이고 상황에 맞지 않는 폭력적인 행동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친구와 나의 남편들, 즉 미국적인 정서에서 내려진 판단이었다.

우리는 아내에 대한 농담이 결국 그들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명예가 실추시키는 부적절한 것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농담이었다는 것이고, 남편들은 크리스 락이라는 한 사람의 '개인'은 자신의 의지대로 농담할 수 있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심지어 그것에 대해 화가 난다고 해도 무대 위로 올라가서 뺨을 때릴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때릴 만했다'와 '때릴 만한 일이 아니다'인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익숙한 관점의 차이이다. '공동체와 개인 사이에 어느 것을 더 우선하여 판단하는가'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하는지'에 대한 사소하면서도 결정적인 차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것들은 내가 어쩌지 못하게 툭툭 튀어나오지만 별 수가 없다.  


  참 이상한 것은 이런 푸닥거리를 수없이 겪으면서도 나와 남편은 서로에게 늘 똑같은 방식으로 화를 내고 화해를 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정 떨어졌겠다 싶어도 늘 누군가가 슬그머니 상대방의 품으로 파고들어 아양을 떤다. 그건 아마 우리가 맺은 협상 때문일 것이다. 처음 서로의 미래를 약속했을 때 우리는 딱 하나만 지키기로 했다. 그건 어찌 됐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제일 먼저라는 것이었다. 의견의 차이가 발생했을 때 누가 더 합리적이고 옳은 지 따지기 보다 일단 서로의 생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우리만의 합의였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서로 다른 점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부적처럼 서로 다짐했던 것인데 의외로 효과가 좋다.

“내 말 좀 들어봐.”

어느 한쪽이 이렇게 선언하면 갈등은 빠른 속도로 사그라든다. 어쨌든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줘야 해서 도중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도 이유가 되지만, 내가 잘못했다거나 상대의 말이 일리가 있단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하면 더 부끄러워지기 전에 얼른 상황을 무마시키는 게 상책이란 판단을 최대한 빨리 내릴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그의 입버릇인 “It will be alright”가 탐탁지 않을 때가 있고, 그는 여전히 나의 속도를 따라오기 버거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모난 곳은 그럭저럭 깎이고 다듬어져 둥글어져 간다. 척하면 척하고 말하기도 전에 상대방의 마음을 금방 짐작하기도 하고, 진짜 좋아하는 것과 그런 척하는 것의 차이도 금방 알아챈다. 나보다 그가 더 소질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수모도 겪었다. 그건 싸움 뒤에 오는 화해 덕택일 것이다. 화해를 하면서 그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나의 불완전함도 오롯이 받아들이는 반성을 기도하듯 견딘다. 스스로가 미워서 어쩌지 못할 때도 변함없이 곁을 지키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내가 나의 인생에 그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처럼 그도 나를 기꺼이 받아준 것이니까.

셀 수도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암석 속에서 짓눌리고 뜨거운 열기를 견디고서야 영원히 반짝일 수 있는 보석처럼 우리의 세월도 힘든 시절과 행복한 시절 모두 견디며 반짝거릴 수 있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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