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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rean in the usa Feb 11. 2024

페퍼로니롤과 사리암



   숲 속에서  눈은 사락, 하며 내린다.

그건 아주 고요하고 한적한 소리이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하얀 눈송이로 열매로 맺고, 세상은 꼭 하얀 캔버스처럼 방향도 없어지고, 시간도 사라진다.

남편은 이런 숲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날씨가 궂으면 전기가 끊겨 벽난로에 불을 키고 온 가족이 몸을 녹여야 할 정도로 한적한 자연의 품에서 자란 그는 또래와는 전혀 다른 유년시절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의 고향 음식은 ‘페퍼로니 롤‘이다. 그는 페페로니롤 이야기만 나오면, 그게 언제든 기어이 향수에 젖어들고 만다.


 나로서는 페페로니 롤이라는 것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라서 막연히 피자 비슷한 것으로 상상했다. 막상 미국에서 와서 실제로 보니 그건 피자보다는 핫도그에 가까웠고 반죽 안에 페퍼로니를 넣고 돌돌 말아 구운 빵이었다. 아주 단순하고 별 맛도 없을뿐더러 다른 지역에선 별로 즐기지 않는 음식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애틋하는지 늘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페페로니롤은 애팔래치아 산맥 근처에서 활발하던 광산업에 종사하는 석탄 광부의 런치 박스에 자주 싸가던 음식이었다고 한다. 우리 식으론  ‘김밥’과 비슷하다고 할까. 남편에겐 어릴 적 먹던 추억의 음식쯤 되는 셈이니, 맛있는 음식이 더 많다는 것은 알아도 그 단순한 맛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조금 특별한 어린 시절을 덕분에 ‘멜팅팟’이라고 불리는 미국에 살면서도 ‘외국 음식’이라는 별로 먹어보지 못했다. 대학에 진학하고서야 처음 스시와 쌀국수를 먹어봤다고 할 정도니까. 그래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매운 음식을 안 먹는 건 너무 당연했고, 바다를 본 적이 별로 없어 해산물도 생소해했다.

“나 이제 조개 잘 먹어.”

바지락칼국수에 들어있는 손톱만 한 바지락을 한 입 먹고는 마치 미식가라도 된 마냥 으스대는 사람이었다.


 나는 바다와 가까운 경상도에서 태어나, 음식 솜씨가 좋은 외할머니와 어머니 덕분에 안 먹어본 해산물이 별로 없었고, 특히 겨울에 먹는 과메기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갓 들어간 무렵에 쫄깃한 과메기가 너무 맛있다고 일기장에 쓰는 바람에, 과메기는 겨울이 되면 온 식구가 날 잡아서 꼭 먹는 음식이 되었다. 또 우리 집은 당시 살던 아파트에서 몇 안 되는 맞벌이를 하는 집이었다. 그래서 우리 남매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부엌에 들어가서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곤 했다.

내가 요리를 제법 잘하는다는 건 금방 알았다. 한 가지 음식에 식재료가 풍부하게 들어가야 맛도 깊어진다는 것도, 음식에 간을 할 땐 은근하게 여러 번 해주어야 짜지 않고 적당해진다는 것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동생이 하루하루 다르게 포동포동하게 살이 쪄서 엄마가 나에게 요리 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한 끼를 먹어도 무조건 갓 만들어서 따뜻하게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피곤한 버릇은 덤으로 얻었다. 어차피 내가 만들어서 내가 먹는 것인데 다른 사람 귀찮게 할 일이 없다는 게 나의 변론이었다.

한식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제철음식을 놓치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허구한 날 서브웨이 샌드위치 쪼가리나 먹고 있는 남편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너 이렇게 계속 살 순 없어. “

사이가 깊어질수록 나는 남편의 입맛을 완전히 바꿔놓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인생에 느닷없이 나타난 한국인 덕분에 남편은 온갖 식당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좌식 테이블이 있는 식당에선 양반 다리를 못해서 인어공주처럼 옆으로 다소곳이 앉아 밥을 먹는 그가 안쓰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더 나은 식생활을 위해선 약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며 큰소리를 뻥뻥 쳤다. 뜻하지 않게 태어나서 처음 보는 생선 아구도 먹어야 했고, 냉면이니 밀면이니 하는 ’cold noodle’ 들도 먹었다. 매운 음식도 먹을 줄 알아야 하니까 닭갈비, 제육볶음, 짬뽕도 먹으러 갔다. 너무 맛있어서 줄을 선다는 삼겹살집에도 갔고, 입에서 녹아 없어진다는 한우구이집에도 가봤다.

그래서 우리가 얻은 것은 2가지였다. 나의 역류성 식도염과 그의 소화불량.

곱창에 이어 막창까지 먹고 나서 그는 그날 밤 크게 배앓이를 했다.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속을 게워내는데 가뜩이나 하얀 그의 얼굴이 질리다 못해 퍼렇게 되자 나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내가 너무 그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더 이상 한식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존중하자고 마음먹었다. 서로에게 더 친밀해지려고 소란을 떨었는데 되레 그와 난 멀쩍히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걸어 나에게 사찰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갑자기 웬 사찰이람? 관광지처럼 크고 유명한 절이 아니라 로컬들이 자주 가는 소박한 절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찾아보다가 눈에 들어온 곳은 청도의 ‘사리암‘이었다. 청도에는 이미 ‘운문사’라는 유명한 사찰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곳을 지나 가파르게 난 산길을 따라 40분쯤 오르면 조그마한 ‘사리암‘이 나온다. 소원을 잘 들어준다는 소문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기도하러 고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올라간다.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드디어 사리암 앞에 도착하자 깊은 산기슭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산이 많은 고향이 생각난 그는 소담한 등성마루를 보며 풍경이 정말 아름답다며 좋아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작은 공양간도 보였다. 남편에게 공양간을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는 선뜻 들어가 보자는 것이었다.

‘공양밥은 남기면 안 되는데…’

나는 걱정이 들었다. 사찰밥이야 말로 그의 입맛에 맞을 리가 만무한데. 내 경험으론 외국인들은 이런 나물들이며 묵은지를 조금 어려워했다. 더 이상 한식에 대해 부정적인 경험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뷔페식이라고 신기해하며 벌써 그릇을 챙겨 줄을 서더니 어느새 미역 나물이며 콩나물무침이며 김치에 밥까지 한 그릇 거하게 담아왔다.


 “와, 정말 맛있다.”

크게 한 입 떠먹더니 그가 정말 행복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줄을 서서 먹는 고깃집에 가서 지글거리는 삼겹살을 먹을 때도, 맛있기로 소문이 난 치킨을 시켜서 맥주와 먹을 때도 그런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외국인들은 그런 음식들을 좋아한다고 알고 있던 나는 그도 당연히 마음에 들어 할 줄 알고 맛있지 않냐고 계속 다그쳤는데, 그럴 때마다 나에게 그렇다고 대답해 주던 것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입맛에 맞아?”

“응, 정말 좋은데?”

그가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나를 보고도 그는 능청스럽게 한 공기를 뚝딱 먹고는 좀 더 먹어도 되냐고 조심스레 묻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 입맛엔 간이 심심하게 되어 최소한의 맛만 낸 공양간의 음식은 소담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가 이렇게 좋아할 거라곤 짐작도 못했다.

“나는 사실 이런 음식이 더 좋아. 감사한 마음을 들게 해 주잖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내려오며 그가 말했다. 맛깔스러운 한식을 좋아하게 만들겠다고 야단을 떨었지만 결국 그가 한국음식을 좋아하게 된 건 정갈하고 깔끔한 사찰음식 덕택이었다. 그리고 그런 음식의 의미를 기꺼이 알아보고 좋아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진 그가 나는 좋았다.  

우리가 사리암에 올라갔던 시절은 사실 내가 그에게 청혼을 받고 나서도, 속으로 우리 정말 잘 살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던 때였다. 내 앞에 앉아 담백하게 간을 해서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찬으로 밥 한 공기를 뚝딱 하는 이 미국인의 모습을 보고서야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외국인’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려고 많은 걸 받아들이는 그냥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우리의 미래가 내게로 걸어왔다.  


 그래서 미국에 정착한 우리의 식단이 주로 한식인 것은 놀랍지 않다. 그냥 꾸준히 먹던 것을 미국에서도 그대로 먹고 있다는 정도이다.

“난 아무 음식이나 먹어도 상관없지만 넌 한식 안 먹으면 안 되잖아.”

미국에 가서도 한식을 일주일 내내 먹는 게 괜찮겠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사실 나로서도 타협의 여지가 없었으니 그대로 쭉 한식이다. 내가 미국 시골에서 유일하게 한국과 연결되는 순간은 다름 아닌 엄마가 좋아하던 맑은 배춧국을 끓일 때이다. 그런 순간들을 남편은 존중해 준다.


 기분이 좋은 날이면 나는 노릇노릇한 감자전을 부친다.

한국과 비교하면 손바닥만큼이나 더 큰 베이크 포테이토를 사서 얇게 썬다. 나에겐 부침가루가 없으니 밀가루에 소금 조금, 후추 조금, 갈릭 파우더도 약간 넣고 물과 함께 섞는다. 그러고 나서 팬에다 기름을 넉넉히 붓고 스토브에 불을 올린다. 반죽이 잘 묻은 감자를 하나씩 팬에 올리면 지글지글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난다. 꾹꾹 눌러가며 부치면 금방 완성이다. 애호박 전을 부치듯 감자를 부쳐낸 것인데 감자의 풍미가 고소하면서도 짜지 않다. 나와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소화가 잘 되면서도 담백한 음식이 되는 것이다.

작정하고 요리를 하기로 한 날이면 김치를 담근다. 한국에서 만드는 김치와는 비교할 수없지만 그 비슷하게는 만들어낸다. 액젓 대신 피시소스를 넣으면 아쉬운 대로 흉내는 낼 수 있다. 배추를 잘라 소금을 뿌리고 재웠다가 건져내서 고춧가루, 간 생강과 마늘, 피시소스를 넣고 마지막에 사과주스를 조금 넣고, 설탕도 조금 넣는다. 그렇게 하면 겉절이와 맛김치 중간쯤 되는 맛이 난다.

그렇게 반찬으로 조금씩 덜어 먹다가 어느 정도 익었다 싶으면 김치찜을 만든다. 좋은 돼지고기를 골라다가 사서 김치와 함께 은근한 불에 끓이기 시작하다가 다진 마늘을 넣고 소금 조금, 설탕 조금 해서 보글보글 할 때까지 불을 올렸다가 채소를 넣고 다시 한번 푹 끓인다. 그러면 김치가 뭉근해지면서 부드러워지고 돼지고기에도 매운 풍미가 베어서 아주 맛이 좋아진다. 남편은 옆에서 신나게 계란 프라이를 부치고, 잘 지어진 쌀밥과 김치찜을 푸짐하게 담아 식탁에 놓으면 아주 근사한 한 끼가 된다. 그 순간만큼은 감사합니다,라고 손을 모으며 어디에라도 기도하고 싶어 진다.

 

 우리 집 식탁엔 우리 부부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국인이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식 재료로 한식을 만들어낸다. 웨스트 버지니아의 우리 주방에선 어느 저녁엔 된장찌개를 끓이는 구수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 또 어느 때엔 야채를 잔뜩 넣은 계란말이 돌돌 돌아가기도 하며, 가끔 곰국을 끓이느라 스토브 불이 꺼질 줄 모르는 날도 있다.

남들은 남편이 한식을 입에 맞아하느냐고 물어보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그냥 싱겁게 대답하고 만다. 남들에게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우리 식탁이 되었다. 거창하지도 않고 소란스럽지도 않고, 각자가 잘하는 것을 맡아서 하루하루 서로를 위해 충실히 해주는 것.


 오늘도 도맡아서 설거지를 하는 남편을 보며 나는 내일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돼지고기를 사다가 돈가스를 만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가 제일 잘하는 특별식 중 하나다. 우리 이렇게 서로 달라서 어떻게 하지, 하며 고민을 많이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서로 달라서 음식만큼이나 풍부한 인생의 풍미를 선물 받았다.

시간이 흘러 그 시절을 돌아보니, 나는 이렇게 소소하게 쌓이는 순간순간들이 인생이 되어가는 것이라는 말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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