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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rean in the usa Jan 28. 2024

Country Road, 시골길






   나의 미국 주소지는 웨스트 버지니아이다.

산이 많고 광산업이 발전했던 이곳의 이름을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자연이 아름다운 곳에 살아서 부럽다는 말도 빼먹지 않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코웃음 쳤다. ‘한 번 와서 살아보라지.’

나의 첫 해외살이는 캐나다 토론토였다. 캐나다의 가장 큰 도시인 토론토는 온갖 이민자들이 커뮤니티를 이루고 사는 곳이라 늘 다양한 인종이 북적인다. 그런 경험에 익숙한 탓에 웨스트 버지니아의 우리 동네에서 처음 장을 보러 갔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넓은 월마트에 동양인이 오직 나 혼자 뿐인 진귀한 경험을 처음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인마트는커녕 아시안 마트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다수의 주민의 인종이 백인인 것은 덤이었다. 전통적으로 백인 거주민의 비율이 높은 지역이었으니 당연한 것이지만 어째서일까, 주눅 드는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남편의 학업과 직장 때문에 다른 선택이 없었으므로 나는 견뎌야만 했다.   


  날이 추워지자 자연히 외출은 점점 줄어들고 나는 소파에 걸쳐 앉아 보고 싶은 영화를 실컷 보기 시작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었다. 그 나날 속에서 내가 하는 것이라곤, 영화 속 세련된 도시를 누비는 멋진 주인공들과 나를 비교해 대는 것이다. 아메리칸드림은 바로 저런 것이었다고 슬퍼하기도 했다. 영화 보는 게 지겨워지면 바깥이 궁금해져 창문을 열었다. 우리 집 창문 너머로는 큰 들판이 보이고 멀리 농장이 있다. 가끔 지나가는 차들이 전부인 한적한 도로 옆에 우리의 작은 집이 있다. 겨울이 되자 동부 해안에 불어 닥친 눈폭풍이 우리의 발을 묶었다. 온통 하얗기만 한 세상. 도시에서 보기 힘든 완만한 언덕에 쌓인 새하얀 설경은 당시 내게 아름답다기보다는 지루했다. 이런 곳에서 나는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낙담했다. 어떻게든 나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남편에게 내가 왜 너 때문에 이런 곳에 살아야 하느냐고 따지기 시작했던 것도 눈이 내리던 겨울 즈음이었다.


  그리고 봄이 왔다. 눈이 더러 녹지 않아 엉망이던 언덕은 깨끗한 푸른색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나는 창문가에 오래 서 있기 시작했다. 마음이 슬그머니 누그러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바깥 풍경을 보는 시간들이 좋아졌다. 소들이 내려와 한가로이 풀을 뜯기도 했고 사슴들이 가끔 내려와 길을 잃은 것처럼 두리번거리다가 껑충거리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바람에 따라 풀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기도 했고 시간이 갈수록 들판의 초록색은 깊고 짙어졌다.

공기가 따뜻해 지자 발코니 문을 줄곧 열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곧장 들어왔다. 나는 어쩐지 발코니에 나가보고 싶어 졌다. 부엌의 나무 의자를 끌어 다가 놓고 앉아 한참이고 바깥구경을 했다. 늘 오전 11시에 느긋한 노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어느 할아버지도. 어느덧 여름이 다가왔다.


  그즘에 나는 영어 공부를 더 하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엔 불편함이 없지만 조금 더 공적인 일들, 이를테면 관공서나 은행에 가서 업무를 본다거나, 또는 영어로 나 역시도 학업을 다시 시작해서 전공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하자면 나의 영어실력은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근처 도서관엘 다니기 시작했다. 크고 한적한 도서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늘 자리가 있고 한산한 공간이 근사했다. 주말에도 붐비는 법이 없었다. 여름의 어느 날 나는 도서관에 함께 따라나선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도서관은 늘 여유로워서 좋아.”

그러자 남편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여긴 도시가 아니잖아.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 거야.”

나는 순간 누군가 내 안의 종을 울린 것처럼 땡, 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이 장소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사실 이곳이 도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겹고 답답하기만 했던 이 동네가 선물하는 한가한 느긋함은 사실 나도 톡톡히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춤추듯 파도치는 집 앞의 들판, 부드러운 산들바람, 깨끗한 하늘, 언제나 한산한 도서관. 그 모든 것이 언제 온 지도 모를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자란 나는 겨울이 지나 봄을 거쳐 여름이 오고서야 나무가 사람보다 많은 웨스트 버지니아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네 마트에 들어서면 오늘도 동양인은 나 혼자다. 이젠 유명인사가 된 기분으로, 요 근래 마트에서 진열해 주기 시작한 한국산 김치를 보며 혹시 나를 위한 선물이 아닐까 놀라워한다. 토론토에선 별로 보지 못했던 낯선 사람들과의 짧은 잡담, 스몰톡도 이젠 그러려니 하고 자연스럽게 맞장구친다. 어쩔 수 없이 튈 수밖에 없는 나를 최대한 요란하게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는 벽안의 낯선 이들의 노력을 나도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을이 왔다. 미국의 가을은 한국보다 조금 더 느리다. 단풍도 보고 싶은 만큼 보고, 서늘한 공기도 즐기고 싶은 만큼 실컷 즐기라는 듯 천천히 지나간다. 집 앞 들판에 울창하던 나무들은 사실 단풍나무였던 모양이다.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어서 나는 매일 집 앞에 서서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댔다. 등산이라면 한사코 싫어하는 나를 데리고 남편은 가을엔 꼭 하이킹을 해야 한다며 쿠퍼스락(Cooper's Rock)에 데려갔다. 사실 하이킹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지만 그곳의 전망대에 서면 웨스트 버지니아는 존 덴버의 노래 속 가사처럼 almost heaven, ‘거의 천국'처럼 느껴진다. 거대한 애팔래치아 산맥이 바다의 고래처럼 넘실거리며 이어지고 계곡을 따라 유연하게 흐르는 강물의 긴 물줄기를 내려다보면 감탄이 나오기보다는, 아름다운 대자연의 모습 앞에 겸허해진다. 구름은 산맥에 걸려 유유히 흘러가고 하늘은 말할 수 없이 높다. 눈을 감아도 계속 떠오르는 그 아름다운 풍경.

“난 여기서 좀 더 살아도 괜찮아”

돌아오는 길에 내가 그렇게 말하자, 남편의 눈이 동그래졌다. 남편이 의기양양 해 할 까봐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한 발쯤은 자연과 닿아 있는 이곳이 평화롭게 여겨진다. 여기가 싫다고 징징거리던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쯤이나 어른스러워질까.


  눈이 펑펑 내렸다. 저번 해 눈폭풍도 대단했는데 올해는 더 만만치 않다. 어쩐지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나도록 이상하게 포근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추위가 몰려오느라고 그랬나 보다. 다시 온통 주변이 하얗게 변했다. 새하얀 세상 속에 우리 집만 덩그러니 있는 기분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렇게 답답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이제 들판의 다양한 모습과 색깔을 알고 눈 속에 덮혀진 아름다운 곳들의 다른 모습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좋아하는 향이 나는 양초를 켜고 아직 남겨둔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앉으니 이 하얀 설경은 어쩐지 낭만적이다. 싫어하는 마음도 좋아하는 마음도 다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내가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어쩌면 내가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플파이를 만들어보자고 부산을 떠는 남편을 보며 그래 이 겨울이 가면 또 푸른 봄이 오겠지, 하고 기대하는 마음도 품어본다. 올해도 아마 존 덴버의 노래처럼 봄이 올 것이다.


Life is old there, older than the trees (그곳의 삶은 숲보다 더 오래되었고),

Younger than the mountains, blowin' like a breeze (산보다는 어리며, 산들바람처럼 불어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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