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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공선사 Jul 11. 2024

나를 경영하는 금강경season5(27.화무소화분3)

내가 상대를 보는 것은 상대에게 투영된 나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약유중생 여래도자 여래 즉유 아인중생수자

(若有衆生 如來度者 如來 卽有 我人衆生壽者)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 하면 여래는 곧 아와 인과 중생과 수자가 있음이니라


여래는 여래를 보고, 중생은 중생을 본다.(如來見如來 衆生見衆生)


내가 상대를 보는 것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투영된 나 자신의 속마음을 보는 것이다.

즉, 내가 내 마음을 보는 것일 뿐 상대는 내 마음과 별개로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상대에게 속은 것은 상대가 나를 속인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속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상대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다.


이것이 실상(實相)이다.


그런데 상대를 보는 나는 나 자신을 통해서밖에 볼 수 없으니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나 자신의 그런 심상(心相)이 멸(滅)해야만 상대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심상(心相)이 멸(滅)하면 심체(心體)가 드러나는데, 이때 상대는 나의 심체(心體)에 마음과 생각은 물론 영혼의 모습까지 그대로 비치게 되어 비로소 상대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때를 정견(正見)을 가진다는 것이다.

정견(正見)이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나 자신과 관계없이 보는 안목이다.


이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하면 여래에게 모든 중생의 실체가 보여지지 않은 것이고, 이것은 심상(心相)으로 보는 것일 뿐이므로 여래는 곧 아와 인과 중생과 수자가 있음이 되고 여래는 곧 여래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에게는 처음부터 제도할 중생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제도해 줄 여래가 없는 것이다.


다만 마음의 상(相)이 있음으로 해서 그늘과 어둠이 생기니 중생과 여래라는 이름이 붙고 제도(濟度)하고 제도받는다는 말이 성립될 뿐이다.


마음의 상(相)이 없다면 여래와 중생이 따로 없고 구제라는 말도 역시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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