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 그 자체가 순수하고 청정한 마음이 없다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며, 낮에 다시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며, 다시 저녁에도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써 보시하여 이와 같이 무량한 백천만억겁 동안을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앞에서는 칠보로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우는 물질보시를 말씀하시고, 여기서는 보시의 최고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존재 자체와 자기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타인을 위해 기꺼이 내주는 목숨에 대한 보시를 말씀하신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쉬지 않고 자기 목숨을 타인을 위해 보시하기를 무량한 세월동한 한다는 표현인데, 평생에 한 번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쳐도 인간세상에서는 의인(義人)으로 칭송되고 존경받는데, 이런 것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보시다.
이런 것을 석가모니불이 지구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천대천세계를 손바닥 위에 놓고 보고 있지 않으면 상상만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크게 더할 수 없는 이런 보시를 표현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석가모니불께서 단순히 이렇게 보시한다는 것을 말씀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첫째, 보시를 한다고 자랑스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큰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 것이 제일 크다고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면 아는 것에 오만해하지 않을 것이다.
보시를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더 큰 아상(我相)을 가지게 되기 쉽다. 그래서 자기의 보시가 상대방에게는 목숨보다 더 큰 가치를 둘 수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별 것 아니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법이므로 자기가 어떤 보시를 하든 이 보시보다 더 클 수 없는 예를 드신 것이다.
둘째, 보시는 일회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매 번 착한 일을 하고 내가 가진 것을 보시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리 단순히 생각할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은 벌써 자기의 상(相)에 매이는 것이기 때문에 보시의 공덕이 일회용으로 끝나버리게 된다.
이른바 한 번 주고 한 번 받는 것이니 서로에게 일회용의 도움이 되고 말 뿐이므로 결국 허망한 일에 불과한 것이 된다.
지속적인 보시는 마치 눈덩이가 산비탈을 굴러내려 가는 것과 같이 각각의 보시가 모여 덩어리를 이루게 되는데, 어떤 업장과 마장이 부숴버릴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뭉쳐져야 비로소 크나큰 공덕의 힘을 발휘하고 자기가 하려는 것에 든든한 기둥이 되는 것이다.
셋째, 보시하는 마음이다.
쉬지 않고 자기 목숨을 그때그때 있는 대로 무량한 세월 동안 보시하여 타인을 살리는 이 보시는 자기가 이런 보시로 얻는 공덕을 따지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공덕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공덕을 누리겠다는 마음이 있으므로 공덕을 누리겠다는 것은 그동안은 보시를 하지 않고 쉰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목숨을 계속 보시하는 그 자체가 순수(純粹)하고 청정(淸淨)한 마음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런 마음으로 보시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보시하여 기껏 타인을 살려주었지만 자기는 귀신이 되어 한(恨)이 맺혀 불행으로 떨어지게 된다. 물론 나중에 이전의 보시로 인해 자기의 목숨도 기적같이 살아나는 도움을 받게 되기는 하겠지만 자기 존재와 운명 자체가 불행해지면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목숨을 주려면 즐겁게 주고 자기에 인생에 대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목숨을 주는 보시를 하는 것은 지고(至高)의 선(善)은 못된다. 지고의 선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인데, 자리(自利)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개 이런 의미가 이 구절에 숨어있는 뜻인데, 다음에 황당한 말씀이 나온다. 이것보다도 더 큰 복과 공덕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