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수진이가 맥주 한 캔을 따서 나에게 건넸다. 옛날 얘기를 하려면 술이 들어가야 했다. 내가 국민학생 시절, 친구들이 피아노 건반 위에서 손가락 춤을 출 때, 나 역시 손가락 춤을 췄다.
어머니는 부업을 하셨다. 우리 자매는 많이 먹지 않았고 학원도 다니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집 한쪽 귀퉁이에 늘 인형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어린이날에 인형을 안고 환하게 웃는 여자 아이들을 보면 짜증이 났다. 인형을 안고 꿈나라로 가는 로망 따위는 애초에 내겐 없었다. 인형은 나에게 노동이었다.
어머니는 일 욕심이 있으셨다. 본인 능력 이상의 일을 가져와서 두 딸에게 시켰다. 목표량을 정해주셨다. 인형 눈알을 다 붙이고 나야 놀이터로 나갈 수 있었다.
업체에서 인형을 수거해 가는 날이면 나는 숨 죽이며 지켜보았다. 그들이 어머니께 작업물이 꼼꼼하지 못하다고 한 소리 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도 검수까지 확실하게 했다. 그 시절 가난한 부모를 원망도 했지만 돌이켜보니 그 일은 나에게 성실함과 책임감을 심어주고 성취감을 맛보게 해 주었다.
“나는 꼼수를 부려 대충 했지만, 언니는 확실히 했잖아.”
그랬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끝을 내야 하는 사람, 과정보다는 결과로 증명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늘 바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남편의 죽음 이후 변했다. 삶의 목표를 잃었다. 시간은 너무 많은데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예전의 나라면 지금의 나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한심하기는...'
내가 한심한 놈인가라는 생각을 할 즈음. 오늘 공장에서 나를 인정해 준 노련한 반장님 얼굴이 떠올랐다. 그분의 감이 맞다면 나는 충분히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였다.
시원한 맥주로 온몸 샤워를 하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숨이 죽어있던 몸속 세포가 고개를 쳐드는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의 피로를 씻어버리고 말끔해진 몸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수면제도 잊은 채.
서준이 방에서 알람이 울렸다. 8시 20분이었다. 어제의 노동은 나에게 숙면을 선물해 주었다. 몸은 여기저기 쑤셨지만 머리는 개운했다. 계속 울리는 알람을 끄러 서준이 방으로 들어갔다. 서준이도 꿈틀대는 것 같았지만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알람을 끄고 나가려는데 책상 위에 딥 핑크색 책을 발견했다. 동아리 활동 발표를 한다고 했던 그 책이었다. 아들 '김서준 지음'이 적혀있는 책이라 더욱 떨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추억이 돼 버린 사진 한 장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 부모님과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바닷가 앞 북카페에서 엄마는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계셨다. 아빠와 나는 모래놀이를 하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엄마가 아빠와 나를 찍어 주셨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사진은 이제 추억이 되었다. 우리 셋은 그때 모두 행복했겠지?
가슴이 먹먹했다. 다음 장으로 넘기려는 찰나였다.
“왜 허락도 없이 봐!”
서준이가 책을 뺏었다. 그리고 나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떠밀리듯 나오게 된 나는 식탁의자에 앉았다.
‘그때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구나.’
남편의 사고 이후, 서준이는 내 앞에서 아빠 얘기를 좀처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서준이는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었나 보다. 서준이 기억 속 아빠는 어떤 모습일까?
남편과 이혼을 얘기할 즈음, 자주 다투긴 했다. 식탁에 혼자 앉아 술 한잔 하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남편 흉을 본 적이 있었다.
"아빠처럼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면 안 되는 거야."
"아빠가 무슨 약속을 안 지켰는데?"
"너네 아빠? 일찍 집에 온다는 약속. 그거 안 지켰지."
나만 평생 사랑한다고 해놓고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준 남편이 미워 아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만 중얼거렸다. 아들에게 아빠의 모습은 지켜주고 싶어서, 내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어서 몹쓸 모습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미쳐가는 정신을 붙들며 애를 쓰며 버텼다.
아들의 기억 속 아빠는 '괜찮은 아빠'여야 했다.
‘그래. 이제 너도 컸는데 네 감정은 네 마음이지.’
깊숙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기 전에 나를 건져내었다. 블랙홀 입구에서 발을 잘못 내딛으면 하루가 엉망이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우울한 전율을 이젠 감지할 수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우울한 생각을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아침을 준비했다. 서준이가 먹든 안 먹든 좋아하는 토스트를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나는 커피 대신 우유를 마셨다. 건강해져야 했다. 어제 공장일로 내가 얻은 교훈이었다.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건강해야 한다.”
아파트 쉼터, 운동기구 쪽으로 갔다. 가볍게 운전대를 잡고 오른손은 오른쪽으로, 왼손은 왼쪽으로 360도 핸들링을 했다. 어제의 뭉친 어깨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10분간 어깨, 허리, 다리 운동을 하고 벤치에 앉았다.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내 앞에 한 중년의 여성이 자전거를 세우고는 짐칸에서 흰색 비닐봉지를 끄집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아파트 현관 입구 쪽으로 가서 출입문 벨을 눌렀다. 아무 답신이 없는지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얼른 가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그녀도 이내 나를 따라 들어와 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녀는 6, 나는 8을 눌렀다. 그녀는 검은 패딩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검은 마스크를 끼고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6층에서 문이 열렸고 그녀는 잽싸게 내렸다. 603호 앞에 흰색 비닐로 꽁꽁 싸인 물체를 내려놓고는 벨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도 전에 그녀는 휴대폰을 보며 계단으로 뛰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문이 닫힐 때쯤 아파트 계단에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