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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은서른아홉부터 Aug 07. 2024

단식 존엄사 - 의사 딸이 동행한 엄마의 죽음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는 한때 내가 이 세상에 사라지길 바랬어. 

온 세상이 너무나 깜깜해 매일밤을 울던 날.



볼 빨간 사춘기라는 뮤지션의 나의 사춘기에게 라는 제목의 노래 가사이다. 나 역시도 제발 세상에서 내가 먼지처럼 사라져 있기를. 그냥 도로뛰어들면 차와 부딪히는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의 기억에서 내가 사라져 있기를. 그리고 역시도 아무 흔적도 없이 그냥 내 이름 세 글자가 부디 사라져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라왔던 그때.


늦은 사춘기와 방황을 20대에 실컷 하던 그때 나는 스위스에 조력자살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존엄사에 한참 심취해 이런저런 루트로 나 역시도 스위스로 건너가 저런 조력자살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더 이상 삶에 미련도 없고 더 이상 내가 삶을 이어가 봤자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여권이나 비자조차 만들어본 경험도 없고, 또 덜컥 스위스까지 건너가기엔 그때 당시 내가 너무 심한 무기력증을 앓고 있던 터라 산 건너 바다 건너 움직이기엔 너무 먼 길이었고 조력자살을 알아보는 선에서 끝난 일이었지만 그때 당시의 나는 벼랑 끝까지 내몰려 정말 하루하루가 고문받는 듯한 괴로움에,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존엄하게 죽고 싶다는 마음이 진심이었다.


그때를 무사히 넘기고 바쁜 하루를 보내다 우연히 저 책을 접했다. 나는 알라딘이라는 온라인 서점을 자주 이용하는데 퇴사 사흘 전 지겨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견디던 점심시간 10분 전 뜬 알람에 잠깐 고민 후 책을 구입했다.


사실 나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한다면 석 달 열흘 1년 365일을 이야기해도 모자랄 것 같다. 사실 내 20대에서 눈이 뜨여 있는 시간에 절반은 분노에 가득 차 죽고 싶은 마음으로 안 해본 짓이 없고 생각해 보지 않은 죽음의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책은, 죽음의 원론적인 이야기였었다. 그것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그리고 본인 스스로 존엄하고 조용하게 죽음을 선택하는.


느지막이 60대 고개를 넘어서는 와중에 소뇌실조증이라는 질환을 확진받은 어머님을 둔 비류잉이라는 대만 의사의 이야기로 책은 시작한다. 


여기서 소뇌실조증이란 운동신경을 담당하는 소뇌가 쪼그라들기 시작하고, 정신은 말짱한데 비해 운동능력마저도 쪼그라들어 결국은 침상에 누워 콧줄에 생명을 의지한 채, 죽는 그 순간까지 가족에게 대소변을 받게 해야 하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고 했다.


유전병인 이 병은 부모 중 한 사람이 걸리면 자녀가 50%의 확률로 걸리는데, 이미 비류잉 씨의 삼촌과 사촌이 와상 생활에 대한 비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가족들에겐 큰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저자의 어머님은 60대에 진단을 받으시고선 그때부터 조금씩 죽음을 준비하셨다. 사전 연명치료 거부서에 서약을 하고 그 뒤에 죽을 날만 받아 기다리는 사람처럼 빨리 죽자 얼른 죽음아 날 찾아와라가 아니라, 꾸준한 요가와 유쾌한 생활을 지속하시고 중풍에 걸린 부군의 뒷바라지를 다 하셨다.


부군께서도 돌아가시고 점점 몸은 쇠약해지기 시작해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서도 83세에 더 이상 거동을 하기가 힘들어지셨고, 그때 어머님은 단식으로 존엄사 하시는 걸 선택하셨다.


이 책에는 어머님께서 단식을 시작하시는 그 순간부터 21일 차 천국으로 이사 가시는 그 시간까지의 기록이 생생히 담겨있다. 가족끼리 생전 장례식을 치르며, 어머님의 천국삶을 응원하고 가족끼리 모여 추억을 회상하고 또 죽음을 목전에 두고 괴로워하는 엄마를 위로하고 가족끼리 상처를 주고 또 받으며. 무수한 고비들과 시행착오.


꼭 찍어 입안으로 넣으면 짠물 가득 터질 거 같은 텍스트들이 때로는 눈물이 났다가 또 때론 불쾌한 골짜기 이론처럼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그 부분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나라에서도 차마 죽지 못해 삶을 연명해서 이어 나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희귀 난치성질환 환자들 뿐 아니라, 불치병 환자, 뒤늦은 사춘기를 맞이해 심한 방황을 하며 20대의 나처럼 삶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느끼는 그런 사람들.


물론 개인이 본인의 온전한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죽음이야 누가 이래라저래라 함부로 입을 댈 수 있겠냐만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하루를 더 이어나가고 싶은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존엄사가 도입된다면, 도입되고 나서 돈이 많이 들어가서 가계 재정에 부담이 된다거나 국가 재정부담이 된다며 삶을 이어나가고 싶은 사람에게 가족이나 사회가 죽음을 조용히 그리고 암묵적으로 종용하게 된다면? 생각의 결론이 여기까지 다다르게 되니 속이 깝깝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OECD 회원국 자살률 출처: OECD, OECD Health Data(2022. 12. 추출)  |  단위: OECD 표준인구 10만 명당 명


OECD 회원국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우리나라.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을 힘조차 다 써버린 사람들이 살아남을 용기보다도 더 커서 선택하는 죽음이라는 선택지. 그 선택을 한 고인들에 우리가 더 뭐라고 말을 할 수 있겠느냐만, 최소한 이 문제는 해결하고 그 뒤에 차차 존엄사에 대한 논의를 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당장 아까운 목숨들을 사회와 이웃이 조금만 정말 조금만 팔 뻗어 건지면 얼마든지 건져 올릴 수 있는 사람들을 손도 안 써보고 허무하게 허공으로 날려 버리면서 벌써 존엄사라는 이야기를 하기엔 우리나라 사회의 분위기와 수준이 아직은 덜 익었고 미달인 것 같다.


나는 언제든 누구든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내가 믿는 신께서 그때가 언제 언제든지 올라오라 하시면 육신이라는 짐을 벗고 심판대 위에 올라가 내가 한 행실만큼 심판을 받게 될 날이 언젠간 올 테지만, 그때를 대비하여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치열하게 그리고 건강하고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


나는 너 뭐 하다 왔니? 물어보시면 당장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처럼 현재를 충실히 살았고, 나누고 베풀며 살다 왔습니다! 하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삶을 살아내는 것.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선택지는 각자의 온전한 선택에 맡길수 있어야 한다는것.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 논의를 하기엔 너무 이르다는것!


오늘의 독후감 끝! 땅!땅!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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