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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은서른아홉부터 Aug 19. 2024

나는 왜 대학교 안 보내줬는데?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 원망 한 스푼

가난한 집 둘째 딸. 내 평생의 멍에이자 이젠 나 스스로 벗어던진 내 신분. 가난하긴 정말 오지게도 가난했고 정말 먹고 죽으래야 죽을 약조차 없던 나날들이었다.


퍽퍽한 당신들 삶을 술로 풀기도 하고 주기적으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술을 마시며 가족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를 보며 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나는 정말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날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선에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비록 결과는 제대로 나오진 않았지만. 공부하는 요령을 몰랐고 꾸준함이 없었다. 항상 집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술쩐내와 담배 냄새가 온 집을 뱀 똬리 틀듯 휘감고 아버지 소리 지르는 소리 엄마 두들겨 패는 소리 듣기 싫어 방황도 많이 했었다. 다시금 말하지만 나는 그 삶을 탈출하기 위해서 정말 내 나름대로의 최선을 했다. 최선이 곧 최고의 결과로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당시 IT광풍이 불었던 그 시절, 김대중정부에선 가난한 우리 집에 최신형 매직스테이션 PC 한 대와 인터넷 메가패스선도 깔아주고, 생활보호대상자 자녀를 대상으로 컴퓨터학원이나 보습학원에도 보내주기도 했다. 결국 그것이 내가 계속 꿈을 품어 나갈 수 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컴퓨터 학원에 원래는 3개월이었지만 학원 원장님의 배려로 1년을 넘게 다니며 각종 자격증들을 섭렵했다. 나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및 기타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 그런 쪽으로 머리가 틔였었나 보다. 열심히 하기도 했고, 재미도 있었다.


그렇게 중학교를 지나고,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쓰면서 당시 중간권이었던 나에게 엄마는 인문계 가지 말고 실업계 가서 얼른 돈을 벌라 종용하셨다. 진짜 집이 가난하기도 했고, 인문계를 가도 딱히 뭐 아무것도 없을 거라 생각되기도 하고, 당시 나는 내 자아도 뭐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가라면 가는 대로, 하라면 하는 대로.


뭐 어영부영 고등학교에 들어가, 내가 이미 학원을 다니며 이미 공부하며 자격증을 땄던 것들이고 나에겐 그냥 복습의 의미밖에 없었다. 다른 애들은 학교 마치고 놀러 다닐 시간에 나는 시청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컴퓨터 강의들을 들으러 다녔다. 한 달 과정이었나 싶다. 그렇게 한 달 과정의 강의들을 몇 번을 배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연식이 계속 올라가고 어느덧 나도 고등학교 2학년. 성적이 곧잘 나오니 담임선생님은 너 정도면 전문대라도 장학금 받고 들어갈 수 있으니 입학은 장학금 받고 다니고 공부 열심히 하면 장학금이 계속 나오니 정말 2년이라도 열심히 공부할 각오로 대학을 가보는 게 어떻냐 제안하셨다.


'가스나는 가르쳐 봤자 남에 집 식구 될 건데, 가르쳐서 뭐 합니까?' 아버지의 가스라이팅이었다. 거기서라도 no!!라고 외쳤어야 했다. 보따리 싸들려 쫓겨날 각오라도 하고 분명히 나는 대학 가고 싶다고 말했어야 했다. 나는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당시 내 위에 언니가 있었고, 언니는 당시 고3이었다. 나는 일단 숨죽이고 언니가 어떻게 하나 보기로 했다. 언니는 11월에 대입수능을 보았고, 언니는 인문계를 들어갔지만 공부보다는 연애사업에 더 관심이 많지 않았나 싶다. 언니는 자기는 꼭 재수를 해야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아무 기회도 없이 자연스럽게 내 자리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대기업생산직 추천서가 들어왔다. 나는 항변할 시간도 없이 추천서에 내 이름을 적었고 사인했다. 그렇게 언니는 재수의 길이라 치고 그냥 흥청망청 놀고 자빠지는 길로, 나는 4조 3교대 공장 생산직으로 자연스럽게 그냥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그냥 그렇게 내 자리는 정해졌다.


그렇게 고졸이란 타이틀로 20년을 사회생활을 하며, 내가 잘한 건 내 거! 내가 못한 건 내 거가 아니라, 네가 잘한 건 내 거. 내가 못한 건 네 거가 되는 참 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상황을 여러 번 겪었다.


내가 몇 날 며칠 고민하고 생각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을 자기 거랍시고 떡 하니 갖다 전시하고, 자기가 잘 못해서 엉망이 된걸 내가 잘 못해서 그런 거라고 덤터기 씌우고. 그냥 나는 순응했다. 그냥 나는 고졸이고 내 한계선은 여기까지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밥 벌어먹고살라면, 아더메치를 잘 참아야 하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만으로 19년을 그렇게 사회생활했다. 그리고 나는 왜 대학을 안 보내줬는지에 대한 원망도 한 스푼 섞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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