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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sHya푸쉬야 Feb 04. 2024

알 수 없는 시간의 연속

죽음의 신종플루가 남겨둔 지혜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요양병원에 갔을 때 일이다. 결혼 후 처음 가는 길이 집이 아니라 요양병원인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팠지만, 최대한 나는 웃는 얼굴로 할머니를 반갑게 보러 가려고 노력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할머니께서 나를 키워주셨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관계는 특별하다.) 

할머니를 만났을 때 쓰라린 마음을 다잡고 절대 울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들어섰다.     



"** , 왔나? 애기는?“

 "아직 애기 없다. 애기 생각은 아직 없는데 .. "           



잠시 생각하시더니,          

"아이고 자식새끼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 잠깐 행복한 거지. 

둘이서 싸우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


          

면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펑펑 눈물이 났다. 

평소에 늘 하시던 말씀이 내가 시집가는 거 보고 눈 감는 거라시며 드라마에서 늘 나오던 대사 그대로 늘 말씀하셨었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 마음이 참 아팠다.

그동안 살아온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나는 마음을 크게 가지고 이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남편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게 너무 싫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겨서 안구가 차오를 때까지 참아보지만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쩔 방법이 없었다. 

펜데믹 이전이었고, 평소 건강관리에 소홀히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빨리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이를 보여드리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혼자 가지는 것이 아니기에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남편은 

" 좀 더 있다가.." 

" 좀 더 있다가 가지자. 좀 더 잘되면.."이라고 말했었다.          




이 무렵부터 나는 아이 생각을 접어두고 집안 살림에 충실히 하면서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운동도 하면서 생각을 비우고 내려놓는 시간을 가지면서 남편의 말을 존중해 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 시간 동안 책을 많이 읽기도 했었고 이것저것 많이 배워두기도 했었다. 

나만의 계획으로 아이가 태어난 이후의 삶도 생각해 보면서 배움의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들이 언제부턴가 점점 더 늘어지고 늦어지기 시작했다.           

'이거 아닌 것 같은데..'라며 남편에게 넌지시 진지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적당히 벌고,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

”지금은 조금 그런데 우리 지금도 행복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

(또 웃으면서 긍정적으로...)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을 앉혀두고 말하고 있는 내 모습은 벽을 두고 혼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피곤한 남편은 당연히 하품이나 하면서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늘 돌아오는 말은                




"내가 잘해 볼게. 돈 많이 벌어볼게." (언제나 웃으면서 긍정적이고 착한 남편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뚱한 표정으로 내저을 뿐이었다.

세상에 이런 말이 있다. '착한 게 다가 아니다'라는 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더니 스트레스 때문이었던지 처음으로 신종플루에 걸렸었다. (신종플루라는 감기도 병원에 가서 알게 되었다. 집에 티브이를 두고 살지 않은 탓에 -) 그런 감기는 처음이라 생각조차 하지 못해서 '괜찮겠지. 괜찮겠지'라고 했었던 것이 열이 40도 가까이 올라갔었다. 주말까지 껴 있다 보니 병원을 가지 못해서 생사를 오가며 이틀을 더 버티고서야 병원으로 향했다.




               

"신종플루네요 - 병원에 좀 더 일찍 오시지 그러셨어요. 

이 정도면 사망할 수도 있어요."               







이 시기에 신종플루로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때이다. 어느 정도인지 표현하자면 좌뇌와 우뇌가 수시로 좌우로 왔다 갔다 바뀌는 기분이었다. 타미플루를 처방받고 집으로 돌아와서 일주일 동안 빠뜨리지 않고 먹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잘 듣는 환자가 되어서는 꼭꼭 챙겨 먹었다. 타미플루를 먹은 지 3일째 되던 날 나는 평생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엄마를 보는 체험을 했다. 






누워있는 나의 옆으로 앉아서 나를 보고 있던 엄마,               

"**야 - 잘 지내지? 잘 지내는 거 보니 마음이 놓인다." 선명하게 들리는 엄마의 음성.          


나도 모르게 "엄마(?)"라고 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꿈인 것 같았다. 이제 하다 하다 헛것도 보이고 이 감기가 보통은 아니구나~ 생각했다. 

그날 뉴스에서 타미플루를 먹고 환청이나 헛것을 보고 베란다로 뛰어내린 학생의 이야기가 나온 걸 보고서는 깜짝 놀랐지만. 

그리고 의식이라는 것이 새삼 중요하다고 느끼게 해 준 남편은 나와 밥도 먹고, 수건도 같이 쓰고 했는데 옮기지 않았다. 그때도 남편은 일에 빠져있었다. 워낙에 참고 인내하는 걸 잘하는 내가 속절없이 밉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했지만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 나도 의식을 다른 곳으로 보내어서 이 상황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겠다 하면서 노력하려 했으나 일주일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남편은 대단한 성자인가 어떻게 그 어려운 걸 해냈을까? 지금 생각하면 코로나보다 신종플루가 더 아팠던 것 같다. 

(저 세상이 멀리 있지 않더라. 바로 코앞에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신종플루를 이겨내고, 고통 뒤에 맛보는 달콤함이란 이런 것인가 싶더라.

인간은 자신이 경험을 한 것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지혜를 얻게 되고 성장하는 동물이라는 것. 

이 광활한 우주는 그때의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남편이 나와 생각을 달리하고 아이를 갖지 않았으며,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코앞에 가져다주고서 이겨내라고 했을까? 

제2의 인생. 

결혼에 골인하고 다른 주부들과 마찬가지로 혼자 이겨내는 시간속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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