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산(경상북도 경산, 우리 동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어김 없이하는 나의 하루시작 루틴은 화장실 다녀오기, 이 닦기, 음양탕 한잔 마시기, 쌀 씻어 담가 두기 그다음이 바로 '거실에 있는 블라인드를 올리며 그날의 날씨 확인하기'이다. 그런데 오늘은 날씨만 확인한 건 아니었다. 바라보는 시선에, 내 눈에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집을 발견했다.
이삿짐센터의 사다리차가 이른 아침부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아침준비를 하는 내내, 사다리차 못지않게 덜커덩거리며 오르락내리락하는 내 심장의, 내 마음에, 내 진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요즘 부동산 거래가 좀 있나?'
'저 집은 팔린 걸까?'
'전세 살던 사람이 나간 걸까?'
그 생각의 끝엔..
'이 집이 진짜 우리랑 인연이 있나?'라는 생각이 머문다.
재작년에 집 앞 부동산에 우리 집을 내놓았다. 집을 내놓은 지 1년 정도 지났을 쯤일까? 전국적으로 집값이 많이 떨어져, 아파트 매매가격이 몇 주 연속 하락세라는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우리 동네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 더군다나 내가 사는 우리 동네는 경상북도 경산. 그중에서도 외곽지라, 오를 때는 가장 늦게 오르고, 내릴 때는 가장 빨리 내린다. 가격을 낮춰보아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우리 집 매물. 매일 쓸고 닦고, 내가 얼마나 깔끔하게 관리를 했는데..
결국, 부동산 소장님이 우리가 내놓은 그 가격으로는 매매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목록에서 내리자고 하셨다. 현재는 우리가 아니, 남편이 매입한 그 금액대쯤 아니면 조금 더 내려간 것으로 알고 있다.
5년 전 주식과 코인, 부동산 투자를 아주.. 제대로 해 드신 남편님 덕분에 내가 살던 곳이 아닌, 타 도시인 이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 집의 투자는 수도 없이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에 투자를 하여 결국 우리 가족이 빚더미와 함께 이사를 하게 된, 눈물 없인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아픈 추억이 되어버렸다.
내 의지가 아닌,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듯 어쩔 수 없이 이 동네로 이사하는 날. 1시간가량 이 동네로 운전해오며, 오는 내내 눈물을 흘렸던 게 또렷이 기억난다. 눈물이 내 눈앞을 가리듯, 앞으로의 내 삶을 보이지 않는 흐릿한 곳으로 안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눈물의 짜장면이 아닌, 눈물의 야끼우동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뜬금없이 왜 야끼우동을 먹었는지 모르겠다. 이삿날에는 짜장면이 진리인데. 아마도 그 중국집이 야끼우동맛집이라 그랬을 수도. 그 상황에서도 그 중국집의 시그니처 메뉴는 포기할 수 없었던, 쓸데없는 나의 자존심이었을까? 이사를 인정할 수 없듯, 짜장면도 인정 안 한다는 나의 마음이었을까? 눈물 콧물 다 흘리고 먹는 야끼우동맛은 니맛도 내 맛도 없었던 것 같다. 서글펐다. 모든 것이 싫었다. 전부 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엄마들의 모임이 있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다음으로, 그다음으로 미뤘는데 내가 모임에 빠지는 날이 많아서 그랬는지, 엄마들이 내가 되는 시간으로 맞추겠다며 무조건 나오라고 해서 어쩔수없이 결국 나가게 되었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중 한 엄마가 얘기를 꺼냈다.
"이번에 이사했다며?"
"응."
"어디로?"
"경산.."
"경산? 내가 아는 사람이 그러던데, 거기 백천동이라는 동네는 공장 다니는 애들이 많이 산대."
"..."
"완희 네가 이사한 동네는 어느 동네야?"
"나.. 백천동인데.."
진짜 뒤로 숨고 싶고, 다른 사람들만 아니면 도망가고 싶었다. 그 순간, 남편이라는 인간의 얼굴이 떠올랐고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열이 올랐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결국 또 눈물을 쏟아냈다. 지금의 나보다, 어느 영화 속에 나오는 죽을병에 걸려 얼마 못 사는 여 주인공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런 비참함을 겪어야 하는가. 나는 자존심이 '쎈' 사람이 절대 아닌데. '죽기보다 싫었다'라는 표현이 이럴 때 쓰는 표현인 것 같았다.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자.
이사를 하고 얼마 안 돼서 시댁 큰 형님이 우리 집으로 조카들이랑 놀러 오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오기로 한 시간보다, 몇십 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행길이라 길을 잘 못 들었나 싶어 전화를 했는데,
"무슨 동네에 배스킨도 없노!"
순간 내 머릿속은 백지상태가 되었고 큰 형님은 우리 집 근처까지 왔다가, 결국 다른 동네로 돌아가 아이스크림을 사서 다시 우리 집으로 왔다.
그 후로 아니 처음부터였지. 나는 밑도 끝도 없이, 우리 동네 백천동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있었다.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싫고.
추워지는 겨울만되면 화목보일러를 떼고 주변 밭에서 쓰레기를 태워 코를 찌르듯 매캐한 냄새가 온동네에 진동하는데 그 공기는 우리집 안으로도 들어와 쉽게 빠져나가지않고, 고속도로는 가까운데 IC까지 가려면 20분 넘게 가야 해서 교통도 불편하고, 학원보다 술집과 음식점이 더 자리 잡고 있어서 당연히 학군도 좋지 않다. 누구는 따라지라고도 하더라. 큰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때 이곳으로 이사를 왔는데 올해 그들이 얘기했던 따라지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을 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이 동네에서 산 지, 6년째 접어들었다. 그동안 나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이 동네의 모든 것들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집만 팔리면 무조건 이사 갈 거야.'라는 마음이 강했는데 집이 안 팔려서 그런 건지, 마음을 내려놔서 그런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동네 백천동이 애처로울 때가 많다.
'이 동네가 대체 나한테 뭘 잘 못했길래,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이 동네를 미워했을까.'
어쩌면 백천동이라는 곳에 살게 된 것이, 내 인생에 어떠한 터닝포인트를 주려고 한 게 아닐까? 란 생각도 든다. 말을 할 수 없는 동네의 모든 것을 탓했던 쓰레기 같은 자존심을 품으며 살고 있던 나에게 지금부터라도 주변을 돌아보며, 제대로 된 마음으로 인간답게 살아보라고 얘기하 듯 말이다.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백천동이라는 동네 안에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동네를 향한 나의 미워했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변화되었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고 싫었던 부분들도 이제는 하나씩 정이 들어간다. 작년 여름에 드디어 배스킨라빈스가 생겼다. (다음에 큰 형님이 우리 집에 온다고 하면 꼭! 얘기해야지.) 그다음엔 집 근처 경산수영장을 1회 2천 원에 이용할 수 있다. (경산시민이면서 자녀 2명 이상이면, 다자녀로 인정이 되어 기본요금 4천원에서 2천원으로 50% 할인 적용된다. 정말 2000원의 행복, 가성비 갑이다.)
아이들 보낼 학원이 많이 없다고 투덜거렸는데, 좋은 강사진들로 이루어진 EBS 인터넷강의를 들으며 학교공부와 병행하여 공부하고 있다. 생활비, 학원비 절감에 굉장히 효과적이다. 물론 아이들의 공부습관에도 도움이 된다. 매일 10분, 20분씩 책상과 붙어있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남편님이 정신을 차렸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다. 그의 모습을 보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가끔 뉴스 속에 부부지간에 '살인' 어쩌고 저쩌고 하는 뉴스를 볼 때면 '미쳤네. 미쳤어. 부부지간에 무슨 일이야?'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런 상황을 겪다 보니 살벌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고, 늦게까지 근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세상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고, 거꾸로 이렇게 극과 극의 감정을 오가는 나와 같이 살며 극과 극의 토함을 받아주는 모습에 고마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내 마음이 가장 많이 가는 건, 우리동네에 내가 좋아하는 산이 있다는 것.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우리 동네 백자산의 높이는 해발 486m다. 삐삐가 생겨났을 때 '사랑해'라는 뜻으로 많이 썼던 숫자인 486. 가수 윤하 노래 중에서도 비밀번호 486 노래를 참 좋아하는데.
하루에 네 번 사랑을 말하고 여덟 번 웃고 여섯 번의 키스를 해줘.
날 열어주는 하나뿐인 비밀번호야. 누구도 알 수 없게 너 만이 나를 가질 수 있도록
백자산의 높이 486m도 내 맘에 쏙 든다. 등산로 입구에서 1시간 30분가량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집이 코앞이라 집에서 먹어도 되지만 백자산 정상에서 먹었던 컵라면과 김밥이 아직까지 잊지 못할 맛으로 기억된다. 먹으며 생각했다.
'빚 갚고 이곳에서 내가 꼭 벗어나리라.'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영화 리틀포레스트에 엄마로 나왔던 문소리가 딸 김태리에게 했던 말. '너를 여기에 뿌리내리게 하고 싶었어.'라는 대사. 나도 내 아이들에게 그렇게 얘기하고 싶다.
'너희들을 여기에 뿌리내리게 하고 싶어.'
경상북도 경산 백천동으로 이사와 살면서,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 안에 있는 진심을 발견하고 느끼는 걸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욕심과 욕망으로 가득했던 내 인생의 삶이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것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도. 올바른 삶의 방향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힘들어도 내가 지난 5년간 이곳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자연이 주는 힘과 나의 소중한 '빛'인 사랑하는 우리 가족 때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