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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침 Apr 28. 2024

최종학력

- 하루의 에디팅

ⓒ 스침

# 못 배운 티?

- 두 번씩이나 전화로 선약을 했던 취재 대상으로부터 잡상인 취급을 당한 적이 있었다. 쫓기듯 돌아서며 "못 배운 티를 내는군"이라고 내뱉었다. 동행한 사진작가가 잔뜩 뜸을 들이다가 내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저분 학벌이 낮아 보여서 하신 말씀은 아니죠?"라고 물었다. 당연히 아니다. 나는 어떤 사람의 최종학력은 죽기 직전에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믿는다. 배우 최민식은 "연기는 죽어야 끝나는 공부"라고 했다. 연기뿐이겠는가. 인생 자체가 죽음에 이르러야 마칠 수 있는 공부다. 관직을 지내지 않은 남성의 경우, 제사 때 '현고학생부군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고 지방에 적는다. 우리는 죽어서까지 모두를 학생으로 기억했던 거다.


- 다수의 개인들은 20대 중후반, 길어야 30대 초반까지의 배움을 최종학력으로 오인하고, 사회는 운칠기삼의 알량한 자격증을 부동의 지위로 인정하는 것이 모든 병폐의 출발이다. 매 순간이 수업이고, 만물이 선생임을 모르고 몇 권의 책에 기대 타인을 가르치려 든다. 차마 보기 역겹다. 채 백 년 살기도 벅찬 인간이 알면 대체 뭘 알 것이며, 그 배움이란 게 얼마나 하찮은가 말이다.


- 입버릇처럼 "S대 나온 놈들이 나라를 망친다"라고 격분하는 동네 친구가 있다. S대가 어디냐고? 음, 숙대는 아니다. 그 친구 말인즉슨, 많이 배웠다는 놈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그 타격이 사회에 치명적이란 뜻이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보다 적확하게 말하자면, 좋은 학교에서 잘못된 걸 많이 오래 배운 놈들이 사달을 일으키는 것이다.  

ⓒ 스침
ⓒ 스침


# 생명을 모시는 순간

- 오늘 뒤늦게 <앙 : 단팥 인생 이야기(2015)>란 영화를 보았다. 이 전형적 일본 영화 속에서 한센병 환자(키키 키린) 앙금을 만드는 순간을 "밭에서 오신 생명을 모시는 순간"(정확한 대사인지는 모르겠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나도 매번 성호를 그으며 식사 기도를 하면서 내 삶의 잠깐이 유지될 수 있게 해 준 귀한 생명의 희생에 감사드린다. 식사는 그런 엄숙한 시간이다.



 - 20년도 더 된 오래된 기억이 있다. 경기도 양주에 사시던 한 교회 장로님 댁에서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분은 한센병 환자셨고, 다 쓰러져가던 옛 양계장 한 구석이 그의 집이었다. 밥때가 되었다며 그가 붕대로 가린 손가락의 흔적만 남은 손으로 가져온 음식은 김치와 계란말이, 그리고 시금칫국이었다.


"계란말이는 곰팡이가 폈네. 이건 나만 먹을 테니 김치에다 드셔."

"상했으면 장로님도 드시지 마셔요."

"난 괜찮아. 워낙 독한 약을 먹어서 이런 걸로 탈 안 나."


그날 알게 된 사실 하나. 시장 좌판에서 파는 정체 모를 무좀약과 피부병약은 한센병 환자들이 자신들이 처방받은 약을 조제해서 파는 거라고 했다. 평생 고름과 진물을 달고 살다 보니 자신들만의 노하우가 있다고.  


ⓒ 스침




# 울력과 수행

- 낡았지만, 아니 손때가 타고 낡아서 멋진 물건들이 있다. 사람도 매한가지다. 자주는 아니지만 멋지게 늙은 사람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차림새와 외모, 그의 두둑한 지갑이 아니라 말을 섞다가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원본으로 기록되지 않는 과거에 그가 울력과 수행깨나 했겠다 싶다.

 


  

# 캐주얼과 정장

- 패션도 일상도 삶도 캐주얼했으면 싶다. 정색하고 점잔 떨고 치장하는 건 피곤하다. 만약 정장을 입어야 한다면 영국식이 아닌 이태리식 정장을 입어야겠다. 정색하되 무례하지 않고, 치장하되 상대를 불편하지 않게. 나, 오늘도 캐주얼하게 살았을까?


ⓒ 스침







PS. 내가 브런치스토리 작가소개란에 '에디터'라고 적은 것은 하루하루의 삶을 에디팅 하며 살고 있다는 의미다. 오늘 하루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짧은 기도를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들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네는 것 전부가 일상의 에디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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