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침 May 06. 2024

明洞多色

- 색과 빛을 담은 거리

ⓒ 스침


# 재즈 같았던 명동

- 내게 명동은 몇 개의 레이어로 추억된다. 첫 레이어의 키워드는 '음식'이다. 아직 교복을 입기 전 외식의 공간이었던 그곳은 명동돈가스와 나무와 철판 위에 갈비를 플레이팅 한 장수갈비, 차이나거리의 화상 중국집, 하이라이스를 즐겨 골랐던 경양식집이었다. 즉, 음식이 풍기던 냄새로 그곳을 기억하는 것이다.


- 추억의 첫 레이어가 음식이었지만 그 레이어는 다시 여러 갈래로 나뉜다. 택시를 타기 전 메뉴를 선택할 때마다 그날의 명동은 다른 목적지가 되었다. 길을 걷다가 먼발치서 가수 송창식이나 양희은을 우연히 마주치면 기타를 배워야지 하고 결심했다. 깜장 교복을 입게 되고 세고비아 기타를 가슴에 품었지만 손의 따로 놀림에 젬병인 나는 이내 좌절하고 말았다. 저작권 개념이 전무하던 시절, 명동은 거대한 스피커였다. 별별 장르의 음악이 계단처럼 거리에 놓여 있었고, 성탄절이 다가오면 극에 달했다. 하지만 이젠 회현 아케이드의 LP점에서도 음악을 틀지 않는다.            



ⓒ 스침




# 미스코리아와 미스터코리아 

- 내게 명동은 미스코리아, 미스터코리아와 등치 된다. 입상한 미스 서울은 대개 명동에 있던 미장원 원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나는 명동 거리에서 사자머리를 하고 무대 화장을 한 여자를 보면 미스코리아일 거라고 확신했었다. 


-  명동을 걷던 무리 중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의 허벅지보다 굵은 팔뚝을 가진 미스터코리아를 만난 적이 있었다. 위풍당당하게 걷던 그와 눈을 마주치진 않았지만 아는 이였다. 중학교 때 체육선생이었으니까. 그는 점심시간에 물을 떠 오라는 심부름을 시킨 뒤 내가 자신보다 먼저 물을 마셨다는 구실로 나의 싸대기를 토르의 망치처럼 생긴 손바닥으로 후려쳤던 장본인이었다. 이후 나는 그와 마주쳤던 그 골목을 애써 피해 다녔고, 이후 부고를 들었다. 



ⓒ 스침
ⓒ 스침






# 지리멸렬했던 청춘

- 성균관 입구나 사찰 선방에서 '한인물입(閑人勿入)', 즉 "한가한 놈은 들지 마라"는 경고문을 보곤 한다. 거기서 쫓겨난 사람들은 명동에 가면 된다. 그곳의 시간은 한가하게 흐른다.


- 내가 그곳을 자주 드나들었던 때가 70년대와 80년대였다. 명동성당과 YWCA를 중심으로 저항의 시간이 불타던 70년대엔 내가 너무 어렸고, 80년대 중반 객관적 청춘이 되었지만 지리멸렬했던 나는 시집을 말아 쥐고 깡술에 취해 밤거리만 배회하다 돌아와 깊이 잠들지 못했다. 87년 6월 함성이 터지던 때 나는 군바리였고 그나마 거리에서 현장을 마주했던 동생은 항쟁을 진압해야 했던 전경이었다.     


ⓒ 스침





# 배호와 명동

- "울면서 떠난 사람아"라고 절규하는 <비 내리는 명동거리>는 <돌아가는 삼각지>나 <누가 울어>보다 덜 알려진 배호의 노래다. 중국에서 광복군의 아들로 태어나 이른 나이에 드러머로 명성을 날린 그가 수많은 명곡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은 71년 그의 나이 고작 29살이었다.


- 흑백 TV에서 본 두꺼운 안경테와 검게 부은 얼굴을 기억하던 나는 그가 적어도 마흔 줄을 넘겨 세상을 떠났다고 여겼었다. 채 서른도 되기 전에 작고했다는 걸 알게 된 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확실히 천재들의 기본값이란 게 있는 모양이다. 다음에 한가한 사람이 되어 니콘 FM2를 어깨에 둘러메고 명동엘 가게 되면 회현 지하상가에서 배호의 LP 한 장은 사 와야겠다. 


  


ⓒ 스침
ⓒ 스침
ⓒ 스침


이전 25화 부러진 글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